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세황제 (문단 편집) == 파행을 거듭한 치세 == 시황제가 6국을 병합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 왕조 진 제국이 출현하긴 했으나 시황제의 급속한 중앙 집권 정책과 과도한 토목 공사는 6국 백성들의 큰 불만을 샀다. 이런 가운데 즉위한 호해는 자신을 황위로 올린 모사꾼 조고에게 휘둘리면서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않았고 이때문에 진나라의 정세는 급속도로 어지러워졌다. 호해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등극하지 않았다는 의혹을 받았고, 정통성에도 논란이 있어서였는지 자신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측면에서 진 시황 대의 대규모 토목 공사를 그대로 이어갔다. 시황제의 거대한 능침인 여산릉의 공사를 계속하는 한편, 시황제 대에도 완공되지 않았던 아방궁과 만리장성의 공사도 이어갔다. 문제는 이런 토목 공사가 지속되면서 백성들의 불만도 커져갔다는 점으로 이를 잘 알고 있던 승상 이사가 호해에게 아방궁 건립의 중단과 조세 부담 완화를 주청했다. 그러나 조고의 농간으로 호해는 이를 자신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진 시황의 치세를 이끌었던 공신 이사는 결국 숙청되고 만다. 이들이 제거되면서 조고의 권력은 커졌고, 호해는 [[지록위마|그에게 모든 국사를 맡겨버리며]], 자신은 [[유흥]]에 빠져들었다.[* 조고는 호해를 어릴 때부터 보필한 내시이자 [[가정교사]]격인 인물로 호해의 정신적 지주였다고 한다. 그런 그가 호해에게 황제의 본분은 오로지 자신의 욕망을 끝없이 추구하는 것이며, 국사는 신하에게 모두 맡기는 것이 미덕이라는 궤변을 늘어놓자 호해는 그대로 홀려버렸고, 결국 후궁에 수천 명의 궁녀를 두고 [[주지육림]]에 빠져들었다.] 정통성의 부족으로 조정에서도 큰 혼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위 후 형제들뿐만 아니라 누이들까지 모두 잔혹하게 처형[* 사마천의 [[사기(역사책)|사기]] 이사열전에는 남자들은 시장에서 참수하고, 여자들은 사지를 찢어 죽였다고 기록되어있다.]하고 그들을 연루하여 선대의 대신들부터 말단 관리들까지 많은 신하들을 처형해서 조정이 텅비었다는 표현까지 나온다. 매끄럽지 못한 등극으로 극심한 내부 분열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불안정한 입지 때문에 공포정치를 택한 것인지 이후에도 거슬리는 간언을 하는 신하들은 모두 죽음을 면치 못했다고 하며 반진봉기가 시작되자 심상치 않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한 신하들도 처형해버린다 ([[숙손통]] 항목 참조). 심지어 좌•우 두 승상인 풍거질, 이사, 장군 풍겁이 함께 지금 반란 진압이 쉽지 않으니 토목공사를 중단하고 백성의 부담을 줄이자고 간언하자 모두 잡아들여 풍거질과 풍겁은 자결케하고 이사는 처형했다. 종실과 최고위 대신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관료들을 몰살시켜버리니 중앙정부가 제대로 기능할리가 없다. 진과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에서 중앙정부의 기능상실은 그것만으로 이미 나라가 반은 망한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중앙집권의 취약점을 스스로 극대화한 상황은 이어지는 반진봉기에 대한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기력한 대처의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결국 진나라의 과도한 조세와 부역 및 급속한 중앙 집권 정책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진승·오광의 난]]이 일어나기에 이르렀다. 이 난은 [[장한]]에 의해 겨우 제압되었으나 문제는 진승·오광의 난으로 진나라에 저항하는 봉기의 불이 당겨져서 각지에 반란이 속출했다. 일단 즉위 2년 9월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춘추전국시대 국가인 [[위(춘추전국시대)|위(衛)]]의 군주를 폐하여 주나라의 명목상 마지막 후계국을 없애버렸으나 이때는 이미 7월에 6국이 모두 부활하고 진승 오광의 난이 벌어진 이후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