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소룡 (문단 편집) === 홍콩 귀국과 대성공 === 당시 홍콩, 대만, 일본 등에서는 왕우(王羽) 주연의 《[[https://www.youtube.com/v/P-gvhVM9S4Q|용호투(龍虎鬪, The Chinese Boxer)]]》(1970)가 대성공하며 이전의 무협영화, 검술영화가 아닌 맨손, 맨몸으로 싸우는 무술영화가 뜨고 있었다. 친구인 [[소기린]]도 이소룡에게 국제전화를 걸어 홍콩으로 돌아올 것을 권유한 적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소룡은 모르고 있었지만, 《그린 호넷》의 케이토 역이 중국인이라는 것이 홍보되었기에 인기가 없어 한 시즌 방영에 그친 미국과는 달리, 중국식 제목은 《청봉협(青蜂侠)》이었지만 홍콩에서 비공식적으로는 《Kato Show》로 알려질 정도로 성공했었다. 이소룡은 이후 자신이 막 홍콩에 돌아왔을 때 홍콩에서 사람들이 그를 알아봐서 놀랐다고 술회했다. 자신감을 되찾았는지, 이소룡은 홍콩 최대의 영화사인 쇼 브라더스(Shaw Brothers: 소씨제편창邵氏製片廠)로 가서 면접을 보았다. 전해지는 말에 따르면 웬 바짝 마른 건달 비슷한 놈이 미국물 먹었답시고 예의도 안 차리고 건들거리면서 들어와서는 자기를 주연으로 해서 영화 찍으라고 해대니 사장이 불쾌해 하면서 화를 내며 내쫓았다고 한다. 그런 이소룡을 잡은 게 쇼 브라더스에서 독립해 나와 가화오락유한공사(嘉禾娛樂有限公司), 즉 추문회(鄒文懷)가 세운 [[골든하베스트]](Golden Harvest)와 두 편의 영화계약을 체결했다.[* 이후 쇼 브라더스는 성룡에게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않았는데, 성룡을 붙잡아 적극 후원한 것도 추문회였다. 쇼 브라더스는 두 마리 용을 다 놓치고, 추문회는 두 마리 용을 다 붙잡은 셈이다. [[http://extmovie.maxmovie.com/xe/review/516267|여배우 정패에 대해서도 좀 더 알 수 있다]].] 그의 첫 작품인 《[[당산대형]]》(1971)으로 흥행기록을 세워 스타가 되었고 연이어 《[[정무문]]》(1972)으로 그 기록을 경신했다. 골든하베스트와 계약을 마무리한 뒤에는 [[협화전영공사]]를 설립해 스스로 각본, 감독, 주연, 무술지도, 제작을 맡은 《[[맹룡과강]]》(1972)으로 다시 신기록을 세웠다. 1972년에는 골든하베스트와 함께 《[[사망유희]]》를 기획하려던 그때 워너 브라더스에서 《[[용쟁호투]]》를 골든하베스트와 합작으로 제작하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당시 스타시즈(Starseas) 영화사와 소송을 준비하고 있었던 이소룡은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소기린[* 1940~1987. 《맹룡과강》에서 이소룡을 처음에는 못마땅해 하며 얕보던 식당 종업원으로 나온다. 정무문에서도 조역으로 나왔었다. 아무튼 배우로 활동했으나 주연인 영화 기린장은 링크된 곳 정보를 봐도 잊혀진 아류작 신세이며 조연으로 좀 나오다가 [[말레이시아]]로 가서 살다가 1987년 교통 사고를 당해 세상을 떠났다.] 주연의 영화 《[[https://extmovie.com/movietalk/544540|기린장(麒麟掌, Fist of Unicorn)]]》의 무술지도를 도와주기로 슬쩍 동의만 해주었는데 이 영화를 제작사가 마치 이소룡 주연인 것처럼 홍보하자 당연히 주연으로 계약한 자신을 개무시했으니 소기린 역시 이에 분노했다고 한다. 소기린은 배우로서 조연배우로 좀 활동하고 되려, 이소룡 친구로서 이런 점으로 알려졌을 뿐, 배우로서 이미지나 여러 모로 듣보잡이었다. 기린장만 봐도 제작자가 왜 저런 짓을 했는지, 소기린이 미덥지 못해 저런 것이라고 이해한다는 의견까지 있을 정도였다.[* 여담으로 기린장 촬영감독인 위해봉은 광동소노호(廣東小老虎, 1971)를 만든 인물인데, 바로 성룡이 처음으로 주연했으나 그 허접성에 성룡도 언급을 꺼리고 2년 동안 개봉도 못했던 영화이다. 73년에서야 개봉해 철저하게 묻혀진 걸 [[취권]]이 대박을 거두면서 1979년 금흠 감독에 의해 조수괴초(刁手怪招)라는 제목으로 재편집했다. 이젠 대스타가 되어버린 성룡을 쓸 수 없으니 대역을 눈을 가리고 싸우게 하는 투로 재촬영하여 섞여놓았던 괴작으로 한국에서 1986년쯤에 삼화비디오에서 "영웅아용"이란 제목으로 비디오를 낸 것을 1989년 취권 개봉 10주년이라며 조수괴초란 제목으로 개봉해 욕만 쳐먹었다. 당시 영화월간지 로드쇼에서 독자 감상란으로 대역을 성룡이라고 나오게 하는 씬이 참 허접이고 성룡 아니라는 거 다 드러났다라고 엄청 분노어린 악평을 할 정도였다. 서울관객 2만 3천여명을 기록하며 흥행은 실패했다. 그리고, 2015년에 조수괴초란 제목으로 또 난데없이 재개봉했는데 딱 1개관에서 상영해 관객 4명을 기록한 것이 전부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