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수근(북한) (문단 편집) == 귀순까지 == 1924년 3월 3일 황해도 [[서흥군]] 구포면 운천리[* [[성주 이씨]] 집성촌이다.]에서 태어났다.[[https://www.joongang.co.kr/article/1111604|#]] 1939년 구포보통학교를 졸업했고 1945년경 [[일본군]]에 입대하였다가 광복 후 귀환하였다. 1946년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이후 20년간 기자로서 승승장구하며 [[김일성]] 수행기자를 거치며 [[조선중앙통신사]] 부사장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러다가 1967년 2월 [[조선인민군]] 창건 기념식에서 김일성을 동행취재한 이수근은 북한 정권에 불만이 있었는지 김일성의 연설을 보도하지 않는 패기를 보여주었고 이 때문에 숙청 위기에 처했으나 3월 22일 판문점 정전위원회 242차 회의에 참석하여 정전위 유엔사 수석대표의 특별고문인 이문항(제임스 리)에게 남한으로 귀순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미군은 긴급 회의를 거친 끝에 이수근에게 회의가 끝나면 영국군 측 대표였던 밴 크로프트 준장의 차[* 외관으로 보아 1964년형 닷지 330으로 추정된다.]에 뛰어들어 망명하라고 귀띔했다. 회의가 끝나자 이수근은 시키는 대로 차에 올라탔고 차는 북한군 경비초소를 돌파하여 귀순에 성공했다. 이 당시 판문점에서는 이 귀순사건 때문에 총격전까지 발생했었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1111626|당시 기사 내용]][* 당시 이같은 내용은 신문에 특종 보도되며 한국 사회의 큰 관심을 모았는데 우리가 알고 있는 예능인 [[이수근]]의 아버지가 이 신문 보도를 보고 '''우리 아들도 저 사람처럼 용감하게 자라서 이름을 떨쳤으면''' 하는 뜻을 담아 한자는 다르지만 이수근의 이름을 아들 이름으로 붙여 줬다고 한다. ~~그렇다고 하기엔 개그맨 이수근 태어났을때 북한 이수근은 이미 간첩혐의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는데...~~] 이수근의 귀순은 당시에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는데 그도 그럴 것이 북한의 국영 [[통신사(언론)|통신사]] 부사장이라는 중책에 있던 사람이니 [[황장엽]] 이전까지 가장 거물급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그래서 이수근은 상당히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 당시 북한에서 귀순하는 인사들이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과정인 보안검사[* 귀순을 위장해서 간첩을 파견할 수도 있다고 해서 중앙정보부에서 귀순한 사람들에게 시행한 절차. 그 절차는 기밀이라고 적힌 서류를 놓아 두고 그 서류를 어찌하는지 반응을 살펴보았다고 한다.]도 면제했을 정도. 그리고 정부의 지원 아래에서 거액의 정착금을 받고 결혼도 했다. 당시 서울에 거주하던 처조카인 배경옥씨도 찾을 수 있게 하였다. 세간에선 이런 파격적인 조치의 배경에는 이수근과 동향이었던 당시 [[중앙정보부]] 부장 [[김형욱]]의 배려 덕이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나 이수근은 점점 남한에도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고 북한 체제가 싫어서 망명했다는 사람이 북한에 대한 공격을 자제하면서 두루뭉술한 태도로 일관하였다. 그래서인지 위장간첩이라는 의심을 받기 시작했던 걸로 보인다. 1970년에 체포된 공작원 김진계는 이수근 망명이 북한 정치권에서도 큰 소동으로 이어졌으며 대남비서 겸 대남총국장 [[리효순]]이 [[김일성]]에게 정치위원회 회의에서 아주 혹독한 비판을 받았다는 교육자료를 받았었다고 회고했다. 리효순은 이수근을 자신이 위장잠입시킨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김일성에겐 씨알도 안먹혔고 [[갑산파 숙청 사건]]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