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수흥 (문단 편집) === 불교에 귀의하다 === 이수흥은 어머니가 집안의 재산을 모두 가로채고 정부와 함께 야반도주한 뒤 안성 일촌에 살고 있는 큰 누이 집에 약 1년간 기숙했고, 서울에 가서 인쇄소 등을 전전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자신과 아버지를 배신한 것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를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그는 가출해 3년 동안 승려 생활을 했다. <기려수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흥은 탄식을 하며 내 기구한 운명이 이에 이르렀으니 차라리 출가하여 승려가 되어 일생을 보내리라 결심하고 원적산으로 들어가 3년 동안 수도 생활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이 절로 찾아와 수흥을 얼싸안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네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다 내 죄이니 함께 산을 내려가도록 하자. 네가 결혼을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라. 또 집이라도 처분한다면 수십만 금은 될 것이니 장사를 하고 싶으면 장사를 하고, 공부를 하고 싶으면 공부를 해도 좋다."하고 간곡하게 당부하니 수흥은 한참동안 묵묵히 있다가 응낙하고 부친을 따라 집으로 돌아왔다. <동아일보> 1926년 11월 17일자 기사에서도 이수흥이 승려생활을 했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수흥은) 1920년 이천군 백사면 원적산에 있는 절에 들어가 2년 동안 중노릇을 하였는데 이수흥은 부친의 간곡한 만류에 집으로 돌아오기는 했지만 삶에 대한 미련을 가지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기려수필>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그러나 수흥은 가슴에 못이 박혀 마음이 편안하지 못하고 매사의 정을 느끼지 못하였다. 노량진에 있는 어느 집에서 고용살이도 해보았으나 역시 마찬가지여서 이와 같이 살 바에는 차라리 죽는 것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자살을 결심하기에 이르렀다. 어느 날 밤 마침내 한강철교를 찾아 물로 뛰어들었는데, 때마침 순시 중이던 경관이 발견하고 즉시 구조하여 자살에 실패하고 말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