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숙번 (문단 편집) == 평가 == 이숙번은 [[조선]] 최초의 [[과거 제도#문과|문과]]에 급제하고 군사에도 밝은 문무 겸비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태종의 최측근으로서 언행을 절제하지 못하고 설치다 결국 상기한 몇몇 사건이 얽혀 남은 생을 유배지에서 보내고 만다. 정종에게 무례했을 당시만 해도 이숙번이 눈밖엔 났지만 정종의 권위를 굳이 드높일 것도 아닌 태종이었기에 유야무야 넘어갔지만, 세자 양녕은 태종의 역린이었다. 그런데 이숙번이 양녕 곁에서 자기를 간접 디스했다는 소식까지 들리니, 태종 입장에선 아직 한창 나이인 이숙번이 후에 경험이 부족한 새 임금을 쥐고 흔들 수 있는 권신이 될 수도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덕분에 부패했지만 나이도 많고 왕실엔 큰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은 [[하륜]]과 달리 이숙번은 유배를 가고 만다. 훗날 세종은 이숙번이 안하무인격으로 권력을 휘두르기는 했어도 '반역'이나 '불충'을 꾀한 적은 없으니 공과 과가 동시에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부친인 태종이 끝내 등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위에 언급된 것처럼 정계로 복귀시켜주지는 않았다. 사실 세종의 치세에선 이숙번 같은 안하무인 타입의 신하는 오히려 방해가 되는 법. 다음은 세종이 이숙번을 평가한 말이다. >"숙번이 광패하고 거친 성격에 상감의 총애를 믿는 마음이 있어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례하여 선왕의 노여움을 산 것이지, 불충한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께서 태상왕(太上王)이 되어서 황희 등을 용서하실 때에도 말씀하시기를, '숙번의 공이 매우 크다. 내가 다시 등용하고자 하나, 그러나 그 죄가 큰 까닭으로 실행하지 못하겠다' 하시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공(功)과 죄가 서로 비긴다.', '비록 그 죄가 있더라도 공으로 덮어 준다.' 하였다. 한(漢)나라 양혼(楊惲)이 재상의 아들로 교만하고 방자하고 무도하여서 원망하는 말이 있게 되자 죽이기에 이르렀는데, 오늘날로써 이것을 본다면 양혼의 죽음이 진실로 옳은 것이나, 선유(先儒)들은 죽이는 것이 지나치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태종께서 이미 등용하시지 아니하신 것을 내가 어찌 다시 등용할 마음이 있겠는가." >---- ><세종실록> 세종 20년(1438) 12월 7일 그런데 세종은 [[하륜]]에 대해서는 이숙번에 비해 평가를 매우 짜게 주었다. 하륜의 말년을 보면 늙어서 판단력이 떨어졌는지 말실수를 여러 번 해서 태종에게서 경고를 여러 번 받았고 탐욕이 매우 컸는데, 세종은 전성기의 하륜은 본 적 없고 이런 삽질+탐욕꾼 모습의 하륜 밖에 모르기에 세종이 느끼는 인상에서는 평가가 박해진 걸지도 모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