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 (문단 편집) === 부모 === 이순신의 부친 이정은 [[음서]]로 벼슬에 올라[* 이정의 조부인 이거(?~1502)가 정3품 당상관을 역임했다. 이순신에게 증조부가 되는 이거는 [[연산군]]의 세자 시절 스승이었고 강직한 간쟁으로 이름이 높아 '호랑이 장령'이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최종 직위는 종5품 창신 교위에 이르렀으나 실무를 맡은 게 아니었고 일종의 임시직이나 명예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창신교위는 무관품계이다. 이는 조부 이거의 공적을 생각해서 주는 것으로 무반직을 역임한 것으로 보인다.] 1583년 11월 15일 타계했는데, 고향의 소식이 늦어 이순신은 부친의 부고를 50일이나 지난 후에야 접하고 뒤늦게 달려가 3년상을 치렀다. 사후 [[1604년]]에 아들 이순신의 막대한 훈공으로 좌의정에 추증되고 덕연부원군에 추봉되었다. 전라 좌수사에 취임한 직후 어머니 변씨를 여수의 고움내(현대의 여수시 웅천 지역)라는 곳에 모시고 봉양했는데, 현대에도 여수에는 '이순신 자당기거지'[* '자당'은 상대방의 어머니를 높여부르는 호칭이다. 말 그대로 이순신 어머니가 기거한 곳이라는 뜻이다.]라고 해서 변씨가 살던 집이 남아 있다. 어머니도 상당히 강직한 여성이었는데, 《난중일기》를 보면 문안 인사를 하고 떠나는 아들 이순신에게 "가거라. 부디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고 격려한 기록도 남아 있다. 이때 이순신은 어머니의 모습을 "두세 번 타이르시고 조금도 헤어지는 마음으로 탄식한 빛이 없으셨다"라고 묘사했다.[* 《난중일기》, 1594년 1월 12일] 1597년 이순신이 파직당하고 백의종군을 떠날 때, 변씨가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배를 [[관(장례)|관]]을 싣고 오다가 병사했는데, 이순신은 어머니의 임종조차 지키지 못하고 소식을 듣고 달려온 것도 모자라, 임지로 떠나는 길이라 장례식도 치르지 못하고 바로 떠나야 했다.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때의 이순신이 느낀 애통함은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 "'''어머니를 마중하려고 나가는 중에''' 아들 울이 종을 보내 "아직 배 소식이 없다."했다. (중략) 조금 있으니 종 순화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알렸다. 뛰쳐나가 가슴을 두들기고 발을 동동 굴렀다. 하늘이 캄캄하다.''' 즉시 갯바위로 달려나가니 이미 배가 와 있었다. '''이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가 없다.'''" >---- >정유년 4월 13일(1597년 5월 28일) 《난중일기》 >'''竭忠於國而罪已至'''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자 했으나 죄가 이미 미쳤고''' >'''欲孝於親而親亦亡''' >'''부모에게 효도를 다하고자 했으나 부모마저 돌아가셨네.''' >'''天地安如吾之事乎''' >'''세상에 어찌 나같은 사람이 있으랴?''' >'''不如 早死也''' >'''속히 죽느니만 못하다.''' >---- >정유년 4월 19일(1597년 6월 3일) 《난중일기》 글을 보는 사람마저 눈물이 날 지경. 더 기가 막힌 것은 모친의 본관이 초계인데, 이 지역은 다름아닌 이순신의 귀양지다. 어머니의 죽음에는 선조도 일정부분 기여한 공이 있다. 아들이 의금부에 잡혀갔다는 소식에 놀란 어머니가 연로한 나이에다 건강도 나쁜 몸인데도 아들을 보기 위해 아산까지 직접 오기로 했고 결국 아산에 오기 전 건강이 악화되어 배 위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