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이동문서 삭제토론 이순신 (문단 편집) === 부인 === 이순신의 아내인 방수진(方守震)은 무관 출신으로 보성 군수를 역임한 방진의 딸인데, 대단한 여장부 기질이 있었던 모양. 어린 시절 방씨 집에 도적들이 쳐들어오자 방진이 방문을 열어놓고 앉아 활을 쏘며 저항했다. 화살이 다 떨어지자, 방수진이 베틀에 쓰는 대나무 가지더미를 바닥에 와르르 쏟아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버지!! 여기 화살들이 있습니다!!"라고 소리쳐 화살이 많이 남아 있다고 속여서 도적들이 도망갔다는 야사가 있다. 또한 류성룡의 글[* 출처: 문집인 《서애집(西厓集)》]에 따르면, 사위인 홍비가 체구가 작아서 마음에 차지 않다며 집에도 들이지 못하게 하고, 집안 노비들을 거느리고 직접 농사를 지어서 집안을 유지하며, 대단히 성격이 강해서 집안 사람들 중 아무도 그녀의 말을 거역하지 못한다고 나온다. 이에 대해 류성룡은 "참으로 장수(將帥)의 집안에는 장수의 아내가 있다"며 감탄했다. 방씨가 사위를 박대한 이유로 단순히 사위의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상대 집안에 대한 항의라는 해석도 있다. 이 사위의 아버지는 이순신의 친구인 홍가신이다.[* 실제 살던 곳도 가까웠다. 이순신이 성장한 곳은 염치읍 백암리 현, [[현충사]] 일대이며, 홍가신은 이웃한 염치읍 대동리였다.] 그런데 홍비는 이 결혼이 재혼이었다. 홍비의 첫 번째 부인이 일찍 죽어서 이순신의 딸과 재혼한 것. 첩으로 들인 것이 아니라 재혼한 것이므로 딱히 문제될 것은 없어 보이지만, 조선 시대에 재취로 딸을 시집보내는 것은 그다지 반기지 않는 게 당시 풍습이었다. 이를 불편하게 여긴 방수진이 사위를 박대함으로써 홍가신 집안에게 항의 표시를 했다는 해석이다. 방수진의 본명은 오랫동안 알려져 있지 않아 후세에 와서는 그냥 '방씨', 혹은 본관을 붙여 '상주 방씨'라고 불려졌다. 일부 야사 및 창작물에서 '연화', '태평'' 등의 이름이 나오긴 했지만 이를 증명할 근거는 등장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난중일기]], 임진장초와 함께 국보 76호로 지정된 서간첩[* 이순신이 친지들에게 보낸 편지들을 모은 글.]을 연구한 결과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10329372|본명이 '수진'임이 밝혀졌다.]] 다만 이에 대해선 '수진'은 방씨의 이름이 아니라 이순신의 장인인 방진을 [[http://news.donga.com/3/all/20180910/91923103/1|지칭하는 것이라는 반박도 있다.]] 허나, 위 기사 속 반박은 시대상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의견이라 아쉽다. 이순신이 부계 쪽인 살던 서울에서 출생하여, 모계쪽이 있던 아산으로 온 것이나 자신의 사후부터 장인으로부터 받은 현중사가 자신의 부계로 이어진 것을 생각하면, 타당성도 있을 것이다. 난중일기에는 그녀도 병을 앓아서 전란 중에 사경을 헤맸다는 기록도 있는데, 아들 이회가 1603년 어머니의 병환 때문에 사직하는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이순신의 전사 후인 1603년까지는 생존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