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 (문단 편집) == 어록 및 장계 == >'(전라)좌우도의 전선은 본시 있던 것과 새로 만든 것을 물론하고 먼저 집합한 것이 110척이요, 사후선도 110척이라 사부, 격군을 합해서 무려 1만 7,000여 명이나 됩니다. 1명당 아침, 저녁으로 각각 5홉씩 나누어준다면 하루 먹을 것이 적어도 100여 석이요, 1달에 드는 것이 3,400여 석 입니다. 경상우도는 벌써 바닥이 나서 식량을 각출할 도리가 없고, 전라도 열 고을만 쳐다보는데, 열 고을에서도 남아 있는 군량에서 백성들을 구제할 식량을 제하고 나면 수군들 먹을 군량은 겨우 앞으로 2달 남짓, 5월 보름께 밖에 더 계속되지 못할 실정입니다.' >---- >《청조획군량장》 갑오년 3월 10일 中 - 군량미를 걱정하는 이순신 장군 >'수전과 육전의 어렵고 쉬운 점, 그리고 지금의 급한 일들을 들어가며 다음과 같이 망령되이 진술하는 바입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겁쟁이이고, 용감한 자는 열에 한둘밖에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분간되지 않고 서로 섞여 있지만 일단 소문만 들리면 그저 도망갈 생각만 하고 놀라서 달아나는데.....[생략] ...... 수전의 경우에는 수많은 군사들이 모두 다 같은 배 안에 있으므로 적선을 바라보고 비록 도망치고 싶어도 도망갈 수가 없으며 노질을 재촉하는 북소리가 울리면, 그 뒤를 군법이 따르니 모두 전력을 내어 싸우게 됩니다. 이것은 수전의 쉬운 점입니다.' >----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육군과 수군의 통솔 차이 >'''수사가 수군의 대장으로서 호령을 내리더라도 각 고을의 수령 등은 자신의 소관 사항이 아니라고 핑계대면서 전혀 시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심지어 군사상 중대한 일까지도 내버려두거나 등한시하는 일이 많아서 매사가 이완되고 있으므로 이런 큰 사변을 당하여 도저히 일을 처리해 나갈 수 없습니다. 반드시 감사와 병사의 예에 따라서 고을의 수령들까지 수사의 지휘를 받도록 해 주시기 바랍니다.''' >---- >《선조실록 계사년 9월 10일》 中 - 이순신 장군이 바라본 전시행정 >'''{{{+1 [ruby(三尺誓天, ruby=삼 척 서 천)] [ruby(山河動色, ruby=산 하 동 색)]}}}''' >'''{{{+1 [ruby(一揮掃蕩, ruby=일 휘 소 탕)] [ruby(血染山河, ruby=혈 염 산 하)]}}}''' >석 자 칼에 맹세하니 산과 강이 떨고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이도다 >---- >이순신의 장검 2자루에 새겨져 있는 문구이며, 해당 문구는 이순신의 친필이다.[* 해당 검은 현재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다.[[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36316&cid=1646&categoryId=1646|#]]] ---- >{{{+1 [ruby(鑄得雙龍劍, ruby=주 득 쌍 룡 검)] [ruby(千秋氣尙雄, ruby=천 추 기 상 웅)]}}} >{{{+1 [ruby(盟山誓海意, ruby=맹 산 서 해 의)] [ruby(忠憤古今同, ruby=충 분 고 금 동)]}}} >쌍룡검을 만드니 천추에 기상이 웅장하도다 >산과 바다에 맹세한 뜻이 있으니 충성스런 의분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도다 >---- >[[쌍룡검]]에 새겨져 있는 문구 ---- >{{{+1 [ruby(閑山島月明夜上戍樓, ruby=한 산 도 월 명 야 상 수 루)]}}} >{{{+1 [ruby(撫大刀深愁時, ruby=무 대 도 심 수 시)]}}} >{{{+1 [ruby(何處一聲羌笛更添愁, ruby=하 처 일 성 강 적 경 첨 수)]}}}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 호가[* 한 곡조의 풀잎피리 소리라는 설과, 일본 피리 소리라는 설이 있다.]는 남의 애를 끊나니 >---- >이순신의 [[시조]] ‘한산섬 달 밝은 밤에’[* 노산 이은상의 번역문.] ---- >{{{+1 [ruby(勿令妄動, ruby=물 령 망 동)] [ruby(靜重如山, ruby=정 중 여 산)]}}} >망령되이 움직이지 말라! 산처럼 무거이 침착하라! >---- >[[옥포 해전]]을 개시하면서 ---- >{{{+1 [ruby(祭死亡軍卒文, ruby=제 사 망 군 졸 문)]}}} > >{{{+1 [ruby(親上事長, ruby=친 상 사 장)] [ruby(爾盡其職, ruby=이 진 기 직)]}}} >{{{+1 [ruby(投醪吮疽, ruby=투 료 연 저)] [ruby(我乏其德, ruby=아 핍 기 덕)]}}} >{{{+1 [ruby(招魂同榻, ruby=초 혼 동 탑)] [ruby(設奠共享, ruby=설 전 공 향)]}}} > >윗사람을 따르고 상관을 섬기는 등 너희는 그 직책을 다했건만 >막걸리를 주고 종기를 뽑는[* 부하를 위로하고 사랑하는 것을 뜻한다. 오자병법에 나온다.] 등 나는 그런 덕이 모자랐도다 >혼을 한 자리에 부르노니 차린 제물 받으오시라 >---- >죽은 군졸을 제사하는 글 ---- >{{{+1 [ruby(今臣戰船, ruby=금 신 전 선)] [ruby(尙有十二, ruby=상 유 십 이)]}}} >{{{+1 [ruby(戰船雖寡, ruby=전 선 수 과)] [ruby(微臣不死則, ruby=미 신 불 사 즉)] [ruby(不敢侮我矣, ruby=불 감 모 아 의)]}}}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옵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죽지 않았으므로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원문: "임진년부터 5~6년간 적이 감히 [[충청도|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 아직 12척 전선이 있사오니(尙有十二 상유십이) 죽을 힘을 내어 막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이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이 아직 죽지 않았으니(微臣不死 미신불사) 적들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죽을 힘을 다해 적을 막겠다는 필승의 신념과 함께, 수군을 폐하면 적이 즉시 서울까지 갈 수 있다고 [[선조(조선)|선조]]의 경각심을 일깨우고 있다. 이 문구는 [[대한민국 해군]]의 큰 가치로서 지금 이 순간에도 해군 장병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으며, 대한민국 해군 기초군사교육단에도 적혀 있다.]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에 실려있는 [[명량 해전]]에 앞서 올린 장계. ---- >{{{+1 [ruby(必死則生, ruby=필 사 즉 생)] [ruby(必生則死, ruby=필 생 즉 사)]}}} >'''[[오자병법|죽고자 하면 살 것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다.]]'''[* [[이순신/창작물#s-15|이순신 만화]]를 그리고 있는 미국인 만화가 온리 콤판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이순신의 명언으로 이걸 꼽았다.] >---- >[[난중일기]][* [[명량 해전]] 전날인 [[1597년]] [[9월 15일]].] ---- >{{{+1 [ruby(此讎若除, ruby=차 수 약 제)] [ruby(死即無憾, ruby=사 즉 무 감)]}}}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 >이충무공행록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 >{{{+1 [ruby(今日固决死, ruby=금 일 고 결 사)] [ruby(願天必殲此賊, ruby=원 천 필 섬 차 적)]}}} >'''오늘 진실로 죽음을 각오하오니, 하늘에 바라옵건대 반드시 이 적을 섬멸하게 하여 주소서.''' >---- >백사집에 기록된 [[노량 해전]]을 앞두고 한 맹세 ---- >{{{+1 [ruby(戰方急, ruby=전 방 급)] [ruby(愼勿言我死, ruby=신 물 언 아 사)]}}} >'''싸움이 급하다. 부디 내 죽음을 말하지 말라.''' >---- >[[노량 해전]]에서 전사하면서 남긴 유언[* 많은 사람들이 흔히 "'''적에게''' 알리지 말라"라고 알고 있지만, 이는 틀린 것이다. 보다시피 이 유언 중에 "적에게"라는 말은 한글이든 한자든 단 한 글자도 적혀 있지 않으며, 후세 사람들이 전쟁의 분위기에 맞추어 추가한 것으로 보인다. 전장에서 적에게 아군 지휘관의 죽음을 알리면 안 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며, 꼭 지휘관뿐만 아니더라도 부상자 발생, 포탄 및 보급품 잔여량 등등 아군의 정보는 그 중요성을 떠나서 당연히 적에게 알리면 안 된다. 다만, 내용 자체는 적에게 알리지 마라는 내용이 맞다. 자신의 죽음이 알려짐 = 아군 수군들의 사기가 하락함 = 적이 자신의 죽음을 눈치채고 사기가 증가할 수 있으니 아군에게(=적에게)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내 죽음은 승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니 적을 물리치는 데 집중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어 "적에게"란 표현이 빠진 원문이 더 비장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 이분[* 이순신 장군의 조카.]의 충무공행록 ---- 임진장초 및 [[난중일기]] 원문 번역 사이트들[* 정조 때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원문이 많고, 초고본은 원문은 매우 드물다. 대신 초고본 한글 번역문은 꽤 많은 편.][[http://www.choongmoogongleesoonsin.co.kr/sub_04/sub_04_01.asp|#]][[https://m.blog.naver.com/ramsid2/220036505599|#]][[https://m.blog.naver.com/hangiree/30006445333|임진장초 원문]] >自壬辰至于 五六年間 賊不敢直突於兩湖者 以舟師之拒其路也 __'''今臣戰船 尙有十二'''__ 出死力拒戰則猶可爲也 今若全廢舟師 是賊所以爲幸而由 湖右達於漢水 此臣之所恐也 戰船雖寡 __'''微臣不死 則不敢侮我矣'''__ >---- >임진년부터 5·6년간 [[왜적|적]]이 감히 [[충청도|호서]]와 [[호남]]으로 직공하지 못한 것은 [[조선 수군|수군]]이 그 길을 누르고 있어서입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결사대|12척의 전선]]이 있사오니''' [[필사즉생행생즉사|죽을 힘을 내어 맞아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지금 만약 수군을 모두 폐한다면 이는 적들이 다행으로 여기는 바로서, 말미암아 호서를 거쳐 [[한강]]에 다다를 것이니 소신이 두려워하는 바입니다. 전선이 비록 적으나, '''미천한 신은 아직 죽지 아니했으니, 적들이[* 원문 상에는 도적 적자가 없지만 주어를 넣어서 의미를 이해한다. 한문에서는 주어를 자주 생략하기 때문이다.]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 >─ 『이충무공전서』, 이분, 「행록」 명량 해전 이전, 조정에서 '수군을 해산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라는 명령을 내리자 이를 반박하며 수군을 끝까지 지휘하겠다는 주장이다. ---- > 招集諸將約束曰 '兵法云, 必死則生, 必生則死。又曰, 一夫當逕, 足懼千夫, 今我之謂矣。爾各諸將, 勿以生爲心, 小有違令, 卽當軍律。'再三嚴約。 > 여러 장수들을 불러 모아 약속하되, "병법에 이르기를 [[필사즉생행생즉사|'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려고 하면 죽는다.']]고 했고, 또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이른 말이다.너희 여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명령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즉시 군율을 적용하여 조금도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재삼 엄중히 약속했다. >---- > [[난중일기]], 정유년 9월 15일([[명량 해전]] 전날)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다'라는 발언은 흔히 이순신이 직접 한 말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난중일기에서도 언급했듯이 병법, 정확히는 [[오자병법]]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그리고 이를 '무조건 죽을 각오로 옥쇄해라'라고 잘못 해석하기도 하나, 사실이 아니다. 이에 대한 정확한 해석은 [[필사즉생행생즉사]] 문서로. ---- >日本之人, 變詐萬端, 自古未聞守信之義也。兇狡之徒, 尙不斂惡。 >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흉악하여, 그 악랄함을 감추질 않습니다. >---- > 답담도사금토패문(答譚都司禁討牌文, 담종인에게 보내는 답장 중에서.-이충무공전서 1권 잡저中) 강화 협상을 하며 전쟁이 소강 상태가 된 1594년, 명나라 칙사인 담종인이 '함부로 왜군과 교전하지 말고 자리를 지킬 것'이란 내용의 통보인 금토패문(禁討牌文)을 보내자, '답담도사금토패문'이라는 이를 반박하는 글을 올렸다. 현대에는 이 중 '저 왜적은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습니다.'라는 구절이 특히 유명하다. 2010년대 이후 [[한일관계]]가 크게 나빠지고 한국 내 [[반일]]감정이 더 강해지면서, 저 문구를 인용하는 사례가 크게 늘었다. 번역본은 왜로 알려졌지만 원문은 보다시피 日本. ---- >이어서 투항해온 왜놈에게 술과 음식을 먹였다. >---- >1596년 1월 15일자 (양력 2월 12일) 일기 中 >어두울 무렵 항복해온 왜놈들이 광대놀이를 차렸다. 장수된 사람으로서 가만히 두고만 보고 있을 수는 없지만, 붙좇은 왜놈들이 놀이를 간절히 바라기에 못하게 하지 않았다. >---- >1596년 7월 13일자 (양력 8월 6일) 일기 中 항왜 관련. ---- >승장 의능에게 천민의 신분을 면해준다는 공문을 봉하여 올렸다. >---- >1594년 1월 14일자 (양력 3월 5일) 일기 中 >장언춘(張彦春)을 천민에서 면하게 하는 공문을 만들어 주었다. >---- >1595년 2월 14일자 (양력 4월 4일) 일기 中 면천 관련. ---- > 잠깐 비가 내렸다. 나라 제삿날[* 인종(仁宗)의 제사]이라 공무를 보지 않았다. 홀로 다락 위에 기대어 나라의 돌아가는 꼴을 생각하니 위태롭기가 마치 아침 이슬과 같다. 안으로는 정책을 결정할 만한 기둥(棟樑) 같은 인재가 없고 밖으로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柱石) 같은 인물이 없으니 나라의 운명이 어떻게 되어갈지 모르겠다. 심사(心思)가 번란해서 종일 엎치락뒤치락했다. >---- >1595년 7월 초1일자 (양력 8월 6일) 일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