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 (문단 편집) == 위상 ==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수많은 [[국민]]들이 [[존경]]과 흠모의 대상으로 삼으며, 그 존재만으로 [[애국심]]과 [[자부심]]을 갖게 해주는 [[한국사]]의 대표적인 구국영웅이다. [[세종(조선)|세종대왕]]과 함께 한국사 최고의 [[위인]]으로 높은 위상과 명성을 자랑하는 인물로,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중심 [[광화문 광장]]에 세워져 있는 대형 동상의 [[주인공]]이다.[* 1968년 4월 28일 건립되어 현재까지 55년동안 수도 서울을 굳건히 지키고 있다. 단 갑옷이 두정갑, 두석린갑 등의 일체형이 아닌 중국식이고 무기가 검인 점에서 고증이 많이 틀렸다. 판옥선과 거북선의 주무기가 화포라는 것만 생각해 봐도 갑판 한가운데에 위치한 장수가 근거리 무기인 검으로 할 수 있는 거야 적군이 코앞에 왔을 때가 아니고서야 없으니 해군사관학교에는 활을 든 동상이 세워지기도 했다.] 국내를 넘어 세계적으로 살펴보아도 이름을 떨친 [[호레이쇼 넬슨]] 같은 명장들은 모두 정부의 많은 지원을 받고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순신은 정부와 외부에서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오히려 반대로 이순신이 정부와 [[명나라]] 육군에게 [[식량]], [[무기]], [[종이]], [[부채]], [[조총]] 등 각종 물자와 진상품을 지원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몰려드는 [[피난민]]들의 생계까지 직접 돌보면서 힘겹고 외롭게 [[전쟁]]을 수행해야 했으며 심지어 [[권율]] 휘하의 육군이 허락도 없이 이순신이 어렵게 마련한 수군이 먹을 식량을 시도 때도 없이 [[약탈]]하고 수군 병력을 마음대로 빼내어 육군으로 편입시키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급자족]]했으며, 휴전기 당시 수군 기지에 [[전염병]]이 크게 퍼져 막대한 병력 손실을 입었음에도 아픈 몸을 이끌고 군비를 꾸준히 확장하여 [[최강]]의 [[함대]]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7년간 수군을 이끌고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모든 전투에서 [[승리]]한 끝에 군함을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23전 23승 불패의 신화'''라는 역사상 유례가 없는 [[전무후무]]한 [[기적]]을 이뤄냈다.[* 다만 이 전승무패라는건 다분히 위인을 수식하기 위한 신화적 미사여구에 가깝고, 실제로는 이기지 못했던게 아닌가 조심스럽게 판단되는 해전도 연구에 따르면 몇개 존재한다.[[https://www.siminsori.com/news/articleView.html?idxno=208425|#]] 2020년대에는 이런 연구를 토대로 한 전적인 45전 40승 5무를 언급하면서, '무패의 신화를 일궈냈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도 있다.[[https://game.donga.com/106860/|#]]] 이순신은 [[제해권]]을 장악하여 [[전쟁]]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적의 [[보급]]을 완벽히 [[차단]]함으로써 전쟁의 흐름 자체를 바꿔 [[망국]]으로 치닫는 [[나라]]를 구해낸 불세출의 [[명장]]이다.[* 평가 목록에도 나와 있듯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방권 장군들도 이순신을 알고 있었다. 심지어 전승했을 뿐만 아니라 배를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특히 [[임진왜란]] 초기 2차 출동 당시 첫 해전이었던 [[사천 해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적이 쏜 총탄에 왼쪽 [[어깨]]를 관통당해 중상을 입는 큰 부상을 당하여 피가 발꿈치까지 흐르는 상황임에도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고통스러운 기색도 없이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하게 지휘했으며, 칼로 살을 찢어 박혀 있는 탄환을 제거한 뒤 부하들과 평소처럼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함께 전투를 진두지휘하며 [[철수]]하는 [[일본군]] 함대 500척을 [[추격]]하여 퇴각로를 [[차단]]한 뒤 맹렬하게 공격을 퍼부어 왜선 200척을 깨부수고 100척을 포획하며 [[일본군]] 수만 명을 처치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날이 밝아 올 무렵 적이 쏜 총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 이순신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의 극한을 펼친 인물이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가 크나큰 공을 세웠기 때문에 융숭한 대접을 받았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선조(조선)|임금]]에게 삼도수군통제가 된 이후 쿠데타 의심과 견제를 받고 [[원균]]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파직]]되어 고문을 당하고 옥살이를 했으며, 피땀 흘려 키워놓은 군대가 [[원균]]의 [[칠천량 해전]]으로 완전히 [[궤멸]]되고, [[어머니]]와 [[이면(조선)|막내아들]]을 잇따라 잃는 등, 인간으로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참]]하고 [[절망]]적이며 [[고난]]과 [[역경]]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삶을 살았지만, 그 모든 것을 이겨내고 마침내 난을 평정한 뒤 홀연히 성스러운 자태를 감춰서 그런지 [[대한민국]]에서는 단지 [[영웅]]이라 부르기에는 부족할 정도로 너무나 위대한 인물이기에 '''[[성웅]]'''이라는 칭호로 불리는 유일한 [[위인]]이다. 조선 후기 [[효종]], [[숙종]], [[정조]]도 이순신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가 말하기를 "이순신의 경우는 참으로 천고 이래 충신이요 [[명장]]이다. 그가 만약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한나라]]의 [[제갈공명]]과 자웅을 겨룬다 할지라도 누가 우세할지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그의 [[명성]]과 의열은 아직도 사람에게 흠모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한다." 라며 매우 [[존경]]했다고 전해진다. 연의의 전략가 제갈량과 정사의 명재상 제갈량 가운데 어느 쪽을 일컬은 것인지는 불분명한데, 당시 [[사대부]]들이 [[중국사]]에 빠삭했다는 점, 정조가 [[삼국지연의]]를 [[수호전]]과 더불어 잡서 취급하며 읽지 않았다는 점(승정원일기 정조 23년 5월 5일)으로 미루어 보면 후자로 추측된다. 반면 이순신은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과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의 충성과 덕망과 재주 모두 무후(제갈량)만도 못하다고 직접 말하기도 했다.] 일본군의 조선 침략 당시 3주 만에 수도 한양, 2개월 만에 평양을 함락시키는 등 전세가 일본군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차에 수군을 거느리고 전투마다 앞장서서 진두지휘하며 뛰어난 지략과 용맹함을 발휘하여 승리했고, 이를 통해 일본군의 북진 중단, 명나라군 파병 등에 일조하며 참화 속의 조선을 구해내고 침략군인 일본군의 야욕을 완전히 꺾어버린 명장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군공 이외에도 휘하 장병과 자기 사람들을 원리원칙에 기반해 철두철미하게 관리 및 대우하고 상업에도 종사하여 자급자족을 이루어 군을 자립시켰으며, 왜란 이전에도 [[이이(조선)|이이]] 등의 고위 관료와 접선을 수 차례 거절하거나 축재를 하지 않았고, 현감 재임기에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푸는 등 지휘관이요 목민관으로서 매우 모범적인 관리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수많은 고난과 핍박을 겪고도 [[노량해전|마지막까지 직접 출전해 분투]]한 철인의 면모까지 갖춰, 조선 중기의 명장을 넘어 [[한국사]] 최고 위인의 반열까지 오른 인물이다. 저서로 [[난중일기]], 서간첩, 이충무공전서, 전시 장계(보고서)를 모은 것으로 임진장초, 충민공계초가 있다. 생전부터 그를 사적으로 알고 있던 인근 백성이나 군졸, 일부 장수와 재상들에게 뛰어난 인물로 평가받았고 안면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명성이 제법 있었으며, 전사 소식이 알려지자 많은 이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크게 슬퍼했다고 전해진다. 사후 [[조정]]은 관직을 [[추증]]했고 [[선비]]들은 찬양시(詩)를 지었으며 백성들은 추모비를 세우는 등, 이순신은 오래도록 많은 추앙을 받아왔다. 이는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도 마찬가지로, 이순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는 위인 중 한 명으로 꼽히며 앞서 말했듯이 현대 한국에서 [[성웅]]이라는 최상급 수사가 이름 앞에 붙어도 어떤 이의도 제기받지 않는,[* 애초에 한국에서 이 수사는 이순신만을 위해서 사용된다. 이해가 안 간다면 한국 사람들이 이순신 말고 다른 위인을 성웅이라고 부르는 적이 있는가 생각해보자.] [[세종(조선)|세종]]과 함께 [[한국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조선사 양대 위인이다. 가장 존경하는 위인을 묻는 설문조사에서도 세종대왕과 1, 2위를 다투며[* 위의 [[한국갤럽]] 조사만 보아도 이순신과 세종대왕이 각각 1, 2위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세종이 1위를 차지한 다른 설문조사들도 많고 확실한 건 둘 중 누구도 3위로 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충무공이라는 시호도 실제로는 [[김시민]]과 같은 여러 장수들이 함께 받은 시호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은 대부분[* [[진주시]]에선 김시민 충무공을 [[충무공동|지명으로도 쓰고]] 적극적으로 홍보해서 다른 충무공도 있었다는 사실이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이순신의 시호로 인식한다. 일반적으로, 이러한 평가에는 정치적인 성향 등이 영향을 끼치게 마련인데, 이순신은 그런 부분에서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말 그대로 구국의 영웅으로 존경받는 인물이라 할 수 있다. 몇몇 전투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공적을 세워 어떻게 이뤄낸 것인지 아직도 학설이 분분할 정도이다.[* [[김유신]] 문서에도 서술되어 있듯이, 김유신도 뛰어난 영웅인데도 사람을 초월한 행적을 보여온 이순신과 비교하면 현실적인 영웅이라는 서술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김유신에 관한 유일한 기록인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은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이 열전을 쓰기 위해 참고할 [[삼국시대]] 당시의 기록이 부족했던 탓에 김유신의 후손이 쓴 김유신 행장록 원본 총 10권 중에서 내용을 추려서 옮긴 것이다. 그 때문에 실제 역사와 [[교차검증]]을 하게 되면 맞지 않는 경우도 발생한다. 김유신 열전에서는 김유신이 전투에 나갔다 하면 매번 승리를 거두고 돌아왔다고 묘사되지만 실제 당시의 [[신라]]는 오히려 수도 [[서라벌]]까지 적국에 위협을 당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경우에는 비교적 근대의 일이고 [[조선왕조실록]], [[난중일기]] 같은 풍부한 조선 측 기록과 일본 측 기록들을 통해 교차검증이 된 것도 많아서 사실로 인정된다.] 가령 [[명량 해전]] 초반부에서 물살이 바뀌기 전까지 약 2시간 가량 이순신은 대장선 1척으로 일본 측 함선 133척과 정면으로 붙어 하나하나 박살내고 있었다.[* 물론 [[울돌목]]은 좁았기에 병목 현상이 발생해 133척 전부가 싸울 수 있던 건 아니다. 문제는 그렇다고 해도 울돌목이 배가 1척씩만 드나들 수 있는 구역인 것도 아니었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기술이나 화력이 압도적인 격차를 보인 것도 아닌데 대장선 1척이 적군을 죄다 두들겨 팬 건 보기 드문 일이다.] 분명히 조선 측과 일본 측의 풍부한 사료로 교차검증이 가능한 기록임에도 너무 믿어지지 않아서 사람들이 오히려 왜곡된 [[유사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믿고 마는 것이다. 이처럼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전투 수행 능력이 익히 알려져 있지만 기록을 보면 전략적인 식견 자체가 압도적으로 뛰어난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당시 이순신의 지휘를 받는 조선 수군의 총 전력은 일본군보다 열세였지만 대부분의 전투를 수적 우위를 점한 채로 압승을 거두며 심할 때는 이러한 각개 격파가 하루 동안 5~6번이 일어나 그 전투들만으로 출정한 조선 수군의 전력을 넘어서는 일본군을 수장해버리는 일도 있었다. 기본적으로 연합 함대를 중시하여 항상 만전의 화력을 갖추고 싸우는 이순신 휘하의 조선 수군이 적보다 열세인 상황에서 전투를 벌인 때는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만한 완벽한 함정을 팠거나([[한산도 대첩]]),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정치]]적 이유로 출정해야 했거나([[장문포 해전]]), 그 이상 전투를 피하면 나라가 망하는 때([[명량 대첩]])뿐이었다. 이순신은 함대 설계 및 훈련, 운영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였다. 전 국토가 전쟁의 화마로 털리는 바람에 교지를 쓰거나 기록을 남길 종이마저 부족했던 중앙 정부에게 종이를 바치기도 했다.[* 난중일기의 1592년 9월 18일자(갑술 양력 10월 22일) 기록에서 <"행재소에서 쓸 종이를 넉넉하게 올려 보내라"고 했으나, 계본을 받들고 가는 사람이 고생스럽게 길로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갈 수 없으므로 우선 장지(狀紙) 열 권을 올려 보냄을 써 올렸다.>라고 썼고 이튿날에는 배로 행재소에 실어 간 이야기까지 썼다. 행재소는 왕이 상주하는 궁궐을 떠나 거둥할 때 임시로 머무르는 별궁이며, 계본은 조선 시대에 왕에게 제출하던 문서 양식이고 장지는 지방 벼슬아치들이 임금에게 보고하는 글을 쓴 종이를 뜻한다.] 남해안 여러 섬에 둔전(屯田)을 만들어 식량을 자급자족했으며 어로 활동으로 군량과 군비를 충당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기피 대상이었던 수군의 병력 유지를 위해 직접 발벗고 뛰어다닌 결과 1만 명 이상의 병력을 중앙 정부의 지원없이 유지했다. 이순신이 중앙 정부에 무언가를 요구했던 것은 [[역병]]으로 병사들이 죽어나갈 때 의원을 보내달라는 것과 화포를 만들 철이 부족하여 조정에 철을 조달해 줄 수 없는지에 대해서 장계를 올린 것 정도다. [[원균]]이 5천명의 병력을 지원받고도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특히 자기 휘하로 피난 온 백성들을 잘 보살피고 다스려 칭송을 받으며 목민관으로서도 훌륭한 면모를 보였다. 다방면으로 뛰어난 업적과 충성심 덕에 적국이었던 일본조차 사후 연구 대상으로 삼기도 했다. 이 밖에도 독보적인 정직함과 청렴함[* 아무리 찾아도 [[부패#s-2|부정축재]] 기록은 전혀 없다.]과 공정함도 현대 한국인들에게 매우 존경받는 이유 중 하나다. 이순신은 장수이자 목민관으로서 그야말로 [[공명정대]]했는데, 백성들과 일개 병졸부터 시작해서 [[스님|승려]]와 [[노비]]까지 하나 하나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이룩한 공을 빠짐없이 세세히 적어 장계를 올려 포상을 받게 했으며, 여차할 땐 자신의 공적을 부하들에게 돌려주는 경우도 허다했다.[* 대표적으로 명량 해전 때 자신의 공로를 [[안위]]에게 몰아준 것이 있는데, 그 덕에 안위는 초고속 승진을 하게 된다.] 허나 자기 휘하 사람들을 마냥 너그럽게 대했냐고 했다면 그것도 아닌데, 훈련을 게을리 하거나 군법을 어기는 병사들을 매우 엄히 다스렸기에 조선 수군이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왜군이 아닌 이순신[* 실제로 이순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은 전투에 따른 사상자보다 군율 위반으로 인한 처형자가 더 많았다.]이었다는 평가도 있을 정도다. 고로 이순신은 [[당근과 채찍]]을 정확히 다루어 부하들을 부렸다고 할 수 있겠다. 또 이런 사람이 임진왜란과 같은 전란기에 때맞춰 등장하여 경이로운 활약상을 남긴 것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 되겠다. 만약 이순신 같은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조선은 수륙 협공을 통하여 일본에게 순식간에 먹혔을 것이고, 이후 명과 일본의 땅따먹기 전면전으로 조선은 말 그대로 가루가 됐을 것이다. 이렇듯 이순신을 뜯어 보자면 '존경하지 않을 이유를 찾는 게 더 어렵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순신은 완벽한 인물이었고[* 다만 일선 장수가 아닌 장군으로 보자면 지나치게 올곧은 성격 탓에 정치 감각이 떨어지고, 자기 휘하의 과거시험은 자기가 치르겠다는 등 인사권에 욕심을 냈다고 의심을 살 수 있는 행동을 한 부분이 있다. 하지만 본인의 아들들이 무과 등과할 성적이 되었음에도 합격하지 못했다(조선 시대엔 상피제도가 있었다). 헌데 그 인사권이 구별되지 않은 조선 시대에서는 그것이야말로 억지일 따름이다. 그리고 이순신이 명군 장수들을 어떻게 상대했는지를 보면 알겠지만 조정과 조율할 능력이 없었다기 보다는 안 했다는 것에 가깝다는 말이 있는데, 그 명나라 군대보다도 현실성이 떨어지는 조선 조정이 이순신의 제의를 대놓고 무시한 것이 더 크다. 집중적으로 전선만 생각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남들이 보기에는 어이 없어할 이순신을 보호해주고 밀어주었다는 착각으로 요약될 정신병 중증말기 환자 선조 입장이란 변명으로 쓴다면, 의심과 배신감이란 주제넘는 망상이 선조의 정신을 장악했을 것이며, 정부 행정력 확보 측면에서는 능력도 없는 주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준 사항이라 망상하며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이러한 덕에 40여 년 가까이 한국인이 존경하는 인물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