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의문점 (문단 편집) == 사망과 관련한 의문점들 == 이순신의 삶은 7년을 넘게 끌었던 전쟁인 [[임진왜란]]과 함께 한 편의 이야기같이 끝났다. 이렇게 '''극적'''인 최후[* [[류성룡]]이 파직된 날도 이순신이 전사한 날과 같다.] 때문에 마치 반대급부처럼 자살 의도설, 사망 위장 후 은둔설 등 여러 낭설이 퍼졌으나 현재까지 어떤 설에도 탄탄한 근거는 없다. 특히 자살 의도설은 이순신의 행장(行狀)에 "免胄(면주, 투구를 벗다)"란 표현이 있어, 이순신이 죽으려고 일부러 갑옷을 벗고 전선에 나갔다는 추측이 난무했지만 胄는 갑옷 전체가 아니라 투구만 일컫는 말이며, 더욱이 "免胄"란 어휘 자체가 《좌전》을 출처로 하여 "사력을 다해 싸우다"란 뜻의 관용어임이 널리 알려지면서, 부정적인 견해가 주류가 되었다. 물론 행장의 지은이가 두 가지 뜻을 모두 담아서 이 단어를 골랐을 수도 있겠다. [[이우혁]]의 《[[왜란종결자]]》에서는 '사망 위장 후 은둔설'을 채택하면서, '그것이 이순신에 대한 정당한 보답'이라고 하여, 음모론 주장자들의 심정을 한 문장으로 나타낸 바 있다.[* 정확한 책의 내용은 "이유도 없는 전쟁에서 조선의 수많은 백성들을 구한 대공을 세운 이순신에게 주어져야 마땅할 운명이라고도 믿는 바이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자살설은 현대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도 상당히 널리 퍼져있기는 했다. 당시 조선 후기의 지식인들이 《좌전》에 나오는 관용구의 의미를 몰라서 자살하였다는 이야기가 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에 대해서 '이순신 생존'에 대한 정보가 말로 전해졌을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결국 당대인들의 이순신에 대한 심정은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2001년에 [[칼의 노래]]를 발표한 소설가 김훈도 그의 여행기 《자전거 여행》 2권에서 이순신의 죽음이 '의도된 전사' 내지 '위장된 자살'이었을 가능성에 대해 "정황 증거로만 따지면 신빙성이 아주 높다"며, 평소 자신의 주장(예를 들어 자기 지휘권 바깥에서 벌어지는 (대부분 중앙의 관리들과도 선이 닿아 있는) 지방 수령과 아전의 무능한 작태나 [[군납비리]], [[부정부패]]의 실상을 낱낱이 적어 조정에 올리고 이들을 군율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 등)이 조정에서 공개되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순신이 노량에서 죽지 않고 살았더라도 [[숙청|임진왜란 이후의 권력 재편 속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을 정치적 여백이 없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당장 대신 중 이순신에게 가장 큰 힘이 됐던 유성룡을 포함한 여러 남인 대신 역시 낙향해서 정치적 입지 역시 약했을 것이다.] 이순신의 최후를 두고 말이 많다 보니,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는 중간에 부하 장수인 가리포 첨사 이영남이 전사하자, 자신의 갑옷을 벗어 덮어주고 빨간 철릭만 입은 채 자신이 직접 북을 두드리며 지휘하는, 그러니까 눈에 확 띄는 모습으로 지휘를 하다가 저격을 맞고 죽는 것으로 나온다. 이도 저도 아닌 뭔가 어중간한 느낌인데, PD가 자살설과 전사설을 절충한 것이라고 한다.[* 다만 세간에서 '인간 이순신'을 연구한다는 취지로 무작정 죽기 무서워서 자살한 척 했다는 설보다는, 장수된 자로서 조국을 전장의 참화 속에서 온전히 지키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남쪽 바다에 묻어버린 자신에 대한 속죄로 적의 탄환에 스스로 맞은 것처럼 묘사하는 설도 있다. 중요한 대사는 바로 "이 바다는, 또한 나의 피도 원할 것일세." 물론 이런 설이 있다는 것이고, 자살설이 옳다는 것은 아니다. 아래에 후술.][* 정작 이순신을 연기했던 배우 [[김명민]]은 대본을 읽고는 이순신이 자살을 선택한 것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작품이 종영된 뒤 나온 특별판에서 인터뷰를 한 것이 있는데, '이순신 장군을 만난다면 하고 싶은 말은?' 이라는 물음에 '왜 그런 선택([[자살]])을 하셨는지 묻고 싶다.'라고 답했다.] 당시 선조가 엄청난 국민적 지지를 받고 있었던 이순신을 견제했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러한 선조의 심리를 명백히 보여주는 부분은,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다르게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이 부산포로 출정하면서 나름대로 선조의 뜻을 따르려는 의지를 보여줬어도, 선조가 이를 모른체하고 이순신을 한양으로 잡아들였다는 사실에 있다. 아무리 전시 상황이라고 하지만, 일국의 왕이라는 사람이 개인적인 정보망도 없었을까? 결론을 말하면 선조는 이미 모든 진실을 알고 있었다. 부산 왜영 방화 사건의 당사자를 선조는 이순신의 부하였던 안위가 한 일이라고 직접 언급하고 있으며, 선조의 명을 받아 부산포로 출정한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양으로 압송 해오기 전에 만약 군사를 거느리고 적과 대치하고 있다면 잡아오기 온당하지 못할 것이니, 전투가 끝난 틈을 타서 잡아오라고 명을 내리기도 한다. 결국, 선조는 이미 이순신을 잡기로 마음을 먹은 상태였으므로, 그 앞에는 어떠한 진실도 필요치 않았던 것이다. 선조의 이런 병맛스러운 행보의 아래에는 민심의 중심이 되는 전쟁 영웅들에 대한 피해 망상과 자격지심이 극대화된 채 깔려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감정적인 면은 차치하고, 현실적으로 보기에 이순신은 전란초기 세운 전공에 의해 민중에겐 영웅이 되어있었으며, 그 지위는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예외적인 지위에 이르렀다. 조선8도 중 북방 2도를 제외한 6도는 수군을 위해 있다고 봐도 무방한데 여기서 전라경상 수군이 그중 70퍼센트를 차지한다. 즉 '''전시상황에서 민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데다가 삼도수군통제사라는 예외적 지위에 까지 올라 북방을 제외한 조선군권의 70% 이상을 가진 위치가 되어버린다.''' 이쯤되면 아무리 본인이 반역의 의지가 없다고 주장한들 총부리가 뒤로 돌 수도 있는 이상 어떤 왕이더라도 이걸 내버려두긴 힘들 것이다. 혹자는 이런 상황이라면 세종 대왕 같은 성군일지라도 '설마...?'하는 의심을 하는 게 오히려 정상이라고 할 정도.] 실제로 초본 《징비록》에 의하면, 선조는 원균의 패전 이후 그 외에 방법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자신의 실책을 인정하고 이순신을 다시 기용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김명원과 이항복이 '이순신을 재기용해야 한다'고 하자 말없이 회의 석상을 나가버리고, 남아 있던 대신들이 의결을 해서 통제사 복직이 결정된 것으로 나오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처럼 선조의 존재를 자살설의 주요한 근거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이순신이 노량 해전이 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될 것을 알고, 선조의 자신에 대한 경계심과 시기심을 의식해서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단, 노량 해전이 마지막 해전이라는 것은 전쟁 전반을 놓고 보았을 때 그랬던 것일 뿐, 아직 부산과 울산 등에서는 일본군의 철수가 완료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즉 노량 해전이 마지막 해전이어서 자살을 계획하고 실행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노량해전 이전의 순천 예교성 전투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막바지에 들어가면 명나라는 전쟁을 피하려는 의도를 강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이순신은 전투의 주도권을 명군이 아닌 본인이 강하게 잡고 있었고, 조선을 침범한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량해전에서 전사하지 않았다면 아직 남아 있는 적을 제압하기 위해 명군의 참전 여부를 떠나 얼마든지 제2의 노량 해전은 벌어질 수 있었다. 즉 쉽게 말해서, 임진왜란이 끝나면서 이순신이 죽은 것이 아니라, '''이순신이 죽었기 때문에 임진왜란이 끝난 것이다.''' 참고로 고니시는 본국으로 무사 귀환을 위해 유정에게는 수급 2천을, 진린에게는 수급 1천을 주겠다고 제안했고, 진린은 결국 여기에 마음이 넘어가버린다. 설상가상 노량 해전이 벌어지기 전인 11월 14일부터 16일까지 일본군과 진린은 서로의 진영을 드나들었고, 거기에 더해 일본군이 진린에게 고기와 술, 창, 칼 등을 바쳤다는 사실이 난중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하지만 뇌물을 다 받아먹은 진린도 결국 이순신이 노량으로 출정하자 말리지 못하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같이 따라 나서는데 이때 명군의 군선이 아닌 조선의 판옥선을 타고 출전한다. 그 이유는 명군 측의 전선(戰船)이 워낙 부실[* 한 때는 [[정화(명나라)|정화]]의 원정에서 보듯 '''아프리카까지 갔던''' 대함대를 꾸릴 자본과 기술력이 있던 명나라였지만 국력의 쇠락과 이런저런 행정적 병크가 합쳐져 임진왜란기에는 대단한 위용을 자랑했던 원정함대가 죄다 유실되어 로스트 테크놀로지가 되어버렸고, 실제 명군의 주력 전선인 호선(虎船)과 사선(沙船)은 그 크기가 일본 측 전선인 세키부네보다도 작은 배라 화포조차 제대로 탑재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조선 수군에게 판옥선을 선물받고 그렇게 좋아했을까.]했던 탓이다. [[역사에의 초대 임진왜란]]에서는 이순신의 사망에 관련된 모든 설을 다 보여 준 뒤 '''이 중에 하나일 것이다'''라는 가설만 세워놓고 어떤 게 확실하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다. 속된 말로 마치 시장에 여러가지 물건을 늘어놓고 그 중 하나를 사가라는 얘기와 똑같다. 여담으로 진린이 뇌물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순신을 이름 대신 이야 혹은 노야라는 극존칭을 사용해서 부르고, 군율을 어긴 명나라 군사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기도 하는 것을 보면 그에게 큰 호감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노량해전이 일어나기 전 진린은 뭔가 불길한 징조를 느꼈는지 그 우려를 담은 편지를 이순신에게 보냈고, 여기에 그가 화답한 내용이 있다. > 吾夜觀乾象。晝察人事。東方將星將病矣。 公之禍不遠矣。公豈不知耶。何不用武侯之禳法乎。<陳璘> > 吾忠不及於武侯。德不及於武侯。才不及於武侯。 此三件事。皆不及於武侯。而雖用武侯之法。天何應哉。 > 내가 밤에는 천문을 살피고 낮에는 인사를 살폈는데, 동방에 대장별이 희미해져 가니 멀지 않아 공에게 화가 미칠 터인데, 공은 어찌 모르시오. 어찌하여 무후([[제갈량]])처럼 기도로써 예방하는 법을 쓰지 않으시오? -진린- > 나는 충성심이 무후만 못 하고 인망이 무후만 못 하고 재주도 무후만 못 하여 세 가지 모두 다 무후만 못 한데, 비록 무후의 기도법을 쓴다 한들 하늘이 어찌 들어주시겠소? -이순신- 이 내용은 진린의 묘소 비문에 나오는 내용으로 1795년에 편찬된 이충무공전서 첫 머리에 '중국 청산도에 있는 진린 도독의 비문에서 채록'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행록을 비롯한 이순신 주변 인물들의 문집을 보면, 오늘 저 적들을 몰아낼 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식의 대화를 많이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순신은 평소에도 항상 죽음을 각오하고 최후의 일각까지 쳐부수는 것을 주장했던 셈이다. 이런 불굴의 의지를 가진 사람이 자살을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게다가 '이 원수를 갚을 수 있다면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라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원수를 갚기 전엔 (너희 왜적들은) 날 죽일 생각은 하지도 말라는 시위와도 같은 것이다. 즉 이순신은 적보다 먼저 죽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