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의문점 (문단 편집) === 면사첩 논란 === 종종 자살설의 요소로 면사첩(免死帖)이 쓰이는데, 이것은 창작물과 실제 역사를 혼동한 데서 오는 오류다. 우선 소설 《[[불멸]]》과 해당 소설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에서 선조가 이순신에게 면사첩을 내린 것처럼 묘사되는 장면이 있고 원균 명장설을 철저하게 부정했으며 고증에도 어느 정도 신경 쓴 소설 《[[칼의 노래]]》에도 면사첩이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면사첩을 선조가 이순신에게 '너를 죽여야 하지만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는 뜻을 전달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문제는 선조가 자신의 명의로 면사첩을 내준 적이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명나라 경리 양호가 초유문(招諭文)[* 반란 폭도들이나, 적, 혹은 적에게 붙었던 자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항복해온다면, 너그러운 조건으로 포용해주겠다는 포고문.]과 함께 면사첩을 보내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뿐. 이우각이 쓴 《통곡》, 《이순신 실록》에서도 같은 오류를 범해서 조선에서 발문한 것으로 나타나지만 공식적으로 이런 기록은 없다. 사실 면사첩은 원래 조선 왕조의 제도가 아니었다. 면사첩의 기록은 왕조실록에서 선조와 인조 시기 딱 19건 정도만 나오고, 조선의 국제인 《경국대전》에도 없다. 다만 순조 19년 《승정원일기》에서 다시 면사첩이 언급되기는 한다. 여기서 집중적으로 면사첩이 나타난 《선조 실록》의 12건의 기록을 확인해보자. 면사첩을 처음 가져와서 배포한 인물은 '''명나라 장수인 황응양'''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독자적으로 조선에서 면사첩을 내리기 시작한 것은 인조 시기인데, 인조의 경우 면사첩이 발급된 이유가 이괄의 난이 직접적이기 때문에, 임진년, 정유년 경우와 동일하게 볼 수 없다. 면사첩에 대한 여러 가지 의견이 있으나, 현재 이순신 역사 연구회와 같은 학술 단체에서는 면사첩 자체가 이순신에게 부여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지방 장수에게 면사첩을 내려 보내 적을 회유하게 한 적이 없으며,[* 울산성 전투 당시 가토 기요마사를 설득하기 위해서 명나라 경리 야불수가 직접 영기와 상공기, 면사첩 등을 함께 사람을 시켜 보냈다. 그리고 선조 26년에 황응양이 강화에 있을 때에 면사첩을 가져와 백성을 구제한 일이 많았으니 그 공로가 크다고 함으로써, 사실상 면사첩의 배포 자체는 조선군 독단으로 수행이 불가능함을 알 수 있다.] 결정적으로 《난중일기》나 기타 《징비록》 등 조선의 장수나 문인들의 기록에서 조선군이 왜란 당시에 면사첩을 배포한 일은 단 한 번도 없다. 게다가 선조 30년 12월 23일의 기록에서 선조가 말했듯이, '''이미 군문(軍門)과 경리(經理) 대인의 분부에 따라 면사첩 3만 장을 인출하였다'''는 데서 면사첩 자체에 대한 권한은 조선군이나 정부가 가진 것이 아니라, 명의 소관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또한 명나라 경리들이 조선군의 일선 사령관에게 면사첩을 보낸 사례도 오직 하나, 이순신에게 나간 것이며, 이순신이 이후에 이것을 배포했다든지 하는 내용이 행록이나 기타 문집, 야사 등지에서도 없기 때문에, 하나의 특수적인 사례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이 때문에 선조가 면사첩을 보냈다는 오해가 발생했다. 그러나 임진년 ~ 정유년 당시 현장 지휘관으로서 면사첩을 받은 장수는 오직 이순신 한 명뿐이기 때문에, 오해가 발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특히 이후 인조 시기에서 면사첩이 군율을 위반한 자에 대한 면사권(비변사 등록)까지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당시 이순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한 양호가 내려 보냈다고 해도 썩 이상할 게 없는 맥락으로 보고 있다. 다만 이순신이 면사첩에 대해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일기를 통해 잘 드러난다. 다만 난중일기 기록에 면사첩을 받았다고만 나오고, 그 후 기록은 없기에 '''이순신 본인이 아니라 이순신에게 왜군을 도운 자들에게 면사첩을 뿌리라는 내용으로도 해석될 수 있기에 명나라 양호가 어떤 목적으로 면사첩을 보낸건지는 알 수 없다. ''' 면사첩 논란을 떠나 아무튼 선조가 이미 이전에 역도로 의심하며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한 이후부터 이순신에 대한 압박을 가했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이순신이 "무능한 왕조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싸웠다"는 주장도 나오는데, 이는 상당히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이다. 여러 사료에서 볼 때, 이순신은 선비로서 국가에 충성하고 부모님께 효를 다하는 유교적인 태도를 버리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나기 때문. 그렇다고 백성을 위해 싸우지 않았다는 말도 맞는 말은 아니다. 충무공은 최전방에서 전장의 참혹함을 실제로 느낀 분이고 이 전쟁에 희생되어가는 백성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을 다한다. 피난민들을 모두 받아들여 그들이 안전하게 살아 갈 수 있도록 목민관으로서의 역할에도 충실했다. 국가에 충성하는 것도 해석하는 자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결론이 나온다. 국가(왕조)=백성으로 동일시한다면 당연히 조선왕조가 있어야 거기에 터를 잡고 살아가는 백성들도 존재하므로 국가를 위해 싸웠다는 것은 결국 백성을 지키기 위해 싸웠다는 의미도 되기 때문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