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의문점 (문단 편집) === 해상 저격 논란 === 하지만 자살설을 부정하더라도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순신이 전투 중에 [[저격]]을 당했다면 대장선이 함대의 전열 맨 앞에서 지휘를 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사용한 [[조총]]은 실질적인 사거리가 40m ~ 50m, 최대사거리인 유효 타격거리도 좋게 쳐줘도 100m 이하였는데, 여기 더해 흔들리는 배 위에서 쏘아야 했던 상황을 생각하면 이순신을 정확히 저격하기 위해서는 못해도 대장선에서 30m ~ 40m 거리까지 접근하여 쏘아야 했다는 말이 된다. 거기다 이순신이 타고 있던 배는 일반 판옥선보다 1층 더 높은 판옥대선이었고, 그에 반해 [[저격수]]는 압도적으로 고도가 낮은 흔들리는 배 위인만큼 그보다도 더 가까운 거리에서 쏴야했을 지 모르는 일이다. 설령 저격이 아니라 단순히 [[유탄|눈먼 총탄]]이었더라도, 어찌됐든 50m 내에서 쏘아야 했다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일본군이 기함의 불과 4~50m 이내의 거리로 들어올 동안 기함에 탑재된 사거리만 500m가 넘는 천자총통과 지자총통들은 다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가? 또 아무리 천자총통이라도 일본군선이 아예 접근할 수 없는 건 아니라고 쳐도, 그럼 이순신 장군이 그걸 미처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적선을 눈치채지 못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일본군이 조총이 아닌 활을 사용하여 먼 거리에서 저격한 것이 아니냐'고 할 수 있겠지만 류성룡의 징비록에선 명확하게 이순신이 일본군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고 기록되어있다.[*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징비록 기준으로는 탄환이 이순신의 가슴을 뚫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고 쓰여져 있다. 갑옷으로 중무장한 신체(자살설을 부정하는 시각으로 바라본다면 당연히 갑옷을 입고 있었을 테니)를 뚫고 나갔다는 것을 보면 유효 타격거리가 아닌 살상거리 안팎에 있어야지 가능하다.] 또한, 이순신 - 일본군 조총수의 거리가 40m ~ 50m 또는 이내의 거리라면 선박 - 선박간의 거리는 더 좁혀지므로(이순신이 대장선의 가장 뒷쪽, 일본군 조총수가 세키부네의 가장 뒤쪽에 있는 경우, 이순신 - 일본군 조총수의 거리는 40미터라고 해도 선박끼리는 붙어있는 상태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격만이 문제가 아니라 배끼리 들이받고 백병전으로 이어질 수도 있는 상황인데, 더욱이 대장선은 대장기까지 달고 있어 눈에 띄기 때문에 주요 타깃이 됨은 말할 것도 없다. 실제로 노량해전에서 명나라 도독 진린의 휘하 장수인 등자룡의 판옥선[* 노량 해전 당시 진린을 포함한 명나라 장수들은 명나라 함선의 구조적 문제로 판옥선에 타고 있었다.]은 일본군 세키부네의 빠른 기동성에 역공을 당해 결국 백병전에 들어갔다. 그 결과 등자룡은 전사하고 그의 판옥선은 불타고 말았다. 물론 이순신의 함대가 포위된 진린의 대장선을 구원하기 위해 근접 거리에서 포격전을 수행하였고 야간[* 12월 16일, 어두운 새벽(전투는 새벽 4시에 시작되었다.)]이었기에 평소보다 더욱 가까운 거리에서 전투가 벌어졌지만, 진린을 구하는데 성공한 이후부터 이순신의 함대는 진린의 함대와 연합해 포위진을 펼쳐 거리를 두고 일본군에 포격을 가한다. 게다가, 이순신이 전사한 시간은 아침 8시였다. 이미 진린을 구하고 일본군 함선들과 거리를 벌려둔 지 꽤 지난 시간이었던 것이다. 거기다 이순신이 전사할 때쯤엔 이미 일본군 함선 200척이 분파되고 150척이 파손을 입어 퇴각하던 상황이었다. 이순신은 조선군이 일본군과의 백병전에서 명백하게 열세인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만큼, 백병전이 들어갈 만한 상황은 연출하지 않았다. 즉 노량해전 후반은 명량해전 때처럼 난전도 아니고 단순히 도망치는 일본군 함대를 추격하는 상황이었는데, 대장선이 함대의 선두에서 적선과 50m 이내의 거리를 유지하며 쫓는, 다소 이상한 상황이었다는 말이 된다. 정리하면, 이순신이 기록대로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한 것이라고 했을 때, 대장선은 일본군 함선들과 50m 안팎의 거리만 두고 백병전을 각오한 채 전투에 임했으며, 이미 조명 연합 함대가 승기를 잡은 뒤 잔당을 소탕하는 중에 평소와는 다르게 대장선을 무리해서 일본군 함선들 바로 앞까지 끌고 가서 싸웠다는 말이 된다. 사실상 매우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다. 그러나 백병전이라고 해서 영화 '명량'처럼 일본군이 아군 판옥선에 마구잡이로 건너가는 백병전 상황은 일어났을 확률이 낮다. 당장 명량해전에서 충무공의 기함 단독으로 세 시간 가량을 싸웠는데도 '''사망자가 2명이다.''' 아무리 충무공이라도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것도 아니고, 판옥선이 체급에서 일본선을 압도하는 만큼 일본군은 판옥선에 접근한다고 하더라도 또다시 판옥선 상층부로 기어오르기 위해서 다시 공성전의 방식을 취했을 확률이 높다.[* [[손무]]는 (공격하는 진영의 입장에서) 공성을 최하의 병법으로 꼽고 있다. 육상 전투에서 방어의 우위를 챙기려는 목적으로 높은 지대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과 비슷한 이유다.] 즉 일본군이 판옥선 위로 건너와 갑판에서 백병전이 벌어진 것이 아니라, 조선 수군이 유리한 고지대에서 밑에서 기어오르려는 일본군을 두들겨 패는 근접전의 양상을 띠었을 것이다. 다만 위의 주장을 요약해서, '조총의 사거리가 50m 남짓인데 어떻게 이순신을 저격하는 게 가능한가? 함포를 쏘면서 전투를 하면 조총의 사거리는 한참 밖 아닌가, 그러면 대장선이 앞서서 백병전을 했다는 비정상적인 상황으로 뭔가 의심스럽다는 말에서의 조총의 사거리가 50m다 아니다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수도 그 안에서 쏘면 일정한 확률 이상으로 적에게 맞을 수 있다는 것 뿐이다. 게다가 당시 총기는 규격화가 안 되어 있어 총마다 성능이 제각각이기도 했다. 그리고 조총의 특성상 노리고 맞추긴 어려워도 충분한 살상력을 유지한 채 한참은 더 날아간다.[* 이를 유효 사거리, 최대 사거리를 언급하며 부정하기도 하나 애초에 조총의 유효 사거리가 짧은 이유는 이 시대 총포는 규격화가 안 되어있고 강선이 없어 탄도 자체가 엄청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살상 가능 거리는 총에 따라, 그리고 화약 양에 따라(이 당시 조총은 규격화가 안 되어있어서 사수가 화약 양을 눈대중으로 넣는다.) 충분히 더 길어질 수 있다. 그러나 당연히 총열이 버틸 수 있는 이상의 화약량은 총이 터져버린다. 다만 이 때는 제식이 없는, 말 그대로 총마다 성능차가 완전히 달라지기도 하는 때라서 평균치도 못 버티고 터지는 경우나 평균치를 상회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조총 유폭 사고는 기록에도 종종 등장한다.] 즉 쏘는 사람에 따라 다른데다가,[* 조총과 같은 초기 총포는 탄도가 현대와 같이 일정치 않아 사수의 실력에 크게 좌우된다.] 당시 전황은 추적 섬멸 중인 상황이었기에 적의 저항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조선 수군이 쓰는 함포는 대부분이 현자 총통이나 황자 총통으로, 이것은 지자나 천자와 같은 화포들에 비하면 사정거리가 상당히 짧은데다 해전 특성상 화포의 유효 사거리는 더 짧아졌을 것이다.[* 황자 총통의 경우 지자나 천자보다 짧은 것이지 당시의 조총보다 짧지는 않다. 황자 총통은 최대 사거리가 500보였고, 이는 조선군이 사용하던 화포들 중 가장 짧았던 축에 속하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현자 총통의 경우 최대 사거리가 2000보에 달했고 이는 지자 총통(800보)이나 천자 총통(1300보)을 상회하는 긴 사거리였다. 보 단위는 시대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략 1.2m에서 1.82m 정도 되는데, 전자인 1.2m로 환산해도 현자 총통의 최대 사거리는 2,400m에 이른다. 즉 유효 사거리는 대략 300m ~ 400m 정도였다. 하지만 해전에서 화포의 유효 사거리는 보통 지상의 절반 수준으로 떨어지는데, 일반적으로 육지 사거리의 절반 거리에서 포격해야 '그나마' 유효한 수준의 명중률이 나오기 때문이다. 반면 조총은 들고 쏘기 때문에 그나마 이러한 선체 움직임의 영향이 적은 편이다. 따라서 교전 중 조총 사거리 내로 들어가는 것이 생각만큼 무리한 이야기가 전혀 아니란 소리다. 판옥선은 단순 장거리 포격뿐이 아닌 조총에 대한 대응 방어와 적함에 대한 유효한 포격, 근접전을 어렵게 하는 선체전고 등 구조적 우위를 활용한 전투를 주로 하였으며 지근거리 교전도 분명 있었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점이 있는데 원거리 포격 만으로 함선을 '격침'시키는 일은 쉬운 일이 결코 아니었다. 이후 전열함 시대만 하여도 충분히 가까운 거리에서 백 문이 넘는 포에 얻어터져도 격침되지 않고 중파나 대파에 머무는 경우가 대단히 많았다. 조선 수군이 화살 형태의 포탄을 사용해서 일반적인 구형 솔리드탄보다 관통력이 좋았고, 일본군 함선이 얇고 약한 삼나무로 만들어져 방호력이 약했던 것을 고려하더라도 제대로 침몰시키려면 흘수선 아래로 완벽한 각도로 포탄이 들어가야 하는데 당연히 쉬운 일이 아니다.] 즉 조선 수군의 포격이란 게 원거리에서 함포만 쏘는 게 아니라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어느 정도 근접해서 때리는 것이 중요했던 것.[* [[천자총통]] 문서에서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화포는 근접 사격을 주력 전술로 삼았을 확률이 높다. 물론 근접 사격만을 주력 전술로 사용했다고 단정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주 전술 중 하나로 쓰였을 가능성까지 부인하기 힘든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이순신이 전사했을 것으로 예상되는 무렵에 적은 사력을 다해 퇴각 중인 상황, 즉 말 그대로 적이 죽자사자하는 추격전 상황에서 지휘관이 위험에 처하는 상황은 충분히 나올 수 있는데다, 이순신에게는 '진린'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당장 순천 왜교성 전투 때도 진린이 혼자 정신줄 놓고 돌격하다가 일본군 수급으로 전락할 뻔 한 전적이 있다. 일본군들이 상대적으로 약한, 또는 궁지에 몰린 쥐라고 생각하고 선두에 서서 몰아붙이던 진린에게 집중적으로 공격을 가했고, 이순신이 그것을 구하기 위해 이동하다 총탄에 맞은 것일 수도 있다. 진린은 이순신의 사망을 전해 듣고 "어른께서 나를 구하러 오신 줄 알았는데 이 무슨 일이오!"하면서 울어댔다. 즉 진린 구출의 과정에서 이순신이 초기에 사망하고, 이후 [[송희립]] 등이 전투를 맡아 진린을 구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여기서 문제는 이순신이 진린의 대장선을 구하려다 전사했다는 기록이 별도로 없다는 점과 노량해전에서 진린을 두 번째로 구한 시각이 이순신이 사망한 시각과 대략 서너 시간 가량 차이가 난다는 점이다. 전투 상황과 결과를 장계로 올려야할 사람이 사망했으니 전황 기록이 세세하지 못했던 것인데, 실제로 전투 이후 선조가 진린과 접견례를 했을 때[* 선조 109권, 32년(1599년 기해 / 명 만력(萬曆) 27년) 2월 7일(정사) 1번째 기사] 진린은 "한창 적이 포위해 올 때 내 배는 큰북을 치고 먼저 나아가고 등자룡(鄧子龍)과 이순신(李舜臣) 두 장수가 좌우에서 협공하였는데 그 두 장수는 다 적에게 죽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죽기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요하지 않아 다행히 패배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운수입니다."라고 이야기한다. 어쨌든 이 때문인지 '이순신 생존설'[[http://history21.egloos.com/817546|#]]도 만만찮게 퍼져있는데, 그 근거로 이순신은 선조와 윤두수, 윤근수 형제의 괴롭힘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위장하고 도주 후 은둔했다는 설이 있다. 근거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1613년, 충무공 이순신의 묘소가 800m 정도 이장되었는데, 이장한 이유에 대해서는 밝혀진 바가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충무공의 삶이 당대는 물론이요 현대에서 보기에도 매우 극적이었기에[* 누명을 썼어도 나라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내거시고, [[명량 해전|절망적으로 불리한 상황에서 적을 죄다 박살내]] 전쟁의 흐름을 아예 바꾸었으며, [[노량 해전|압도적인 열세로 시작한 마지막 전투]]에서 조국의 원수들을 무수히 깨부순 뒤 적탄에 맞아 장렬히 전사한 충무공의 삶은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만큼 극적이다. 그야말로 영웅 소설이 현실 세계에 고스란히 실현되었다고 봐도 될 정도다.] 이러한 떡밥들이 남은 것이다. 1592년 사천 해전에서 어깨에 총상을 입었던 적이 있었듯이 이순신은 항상 부상당할 위협에 놓여 있었다. 임진장초에 기록된 승첩 장계들을 보면 사천 해전 이후 벌어진 한산도 해전이나 부산포 해전에서도 끊임없이 대장선에서 부상자가 나오며, 이는 대장선 역시 적의 위협 사거리 내에서 전투를 벌였다는 것을 뜻한다. 한 척으로 수백 척의 적선을 막아내야 했던 명량 해전에서도 부상당하지 않은 장사가 전쟁 막바지에 총탄에 맞아 전사했다는 것 때문에 이런 의문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하늘이 내린 사람은 하늘이 거둬간다'는 말처럼 극적인 영웅의 삶이었다고 할 수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