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의문점 (문단 편집) === 유명 수군 도독 수여 여부 논란 === 이 부분이 뜬금없이 들어간 것이 맞지 않을 수 있지만, 유명 수군 도독(有明水軍都督)이란 단어 자체가 명나라 품계 정1품으로, 이순신이 생전에 도독직을 수여 받았다면 명나라에서는 선조 바로 아래 급, 즉 조선의 이인자로 대우하였다는 뜻이다.[* 명나라에서 친왕과 도독이 둘 다 정1품이라는 기존의 서술은 사실이 아니다. 세종실록 세종 9년 10월 19일 癸酉 2번째기사를 보면 세종이 "中朝官制, 首親王, 次公侯, 次一品" 즉 "중조(명나라)의 관제에는 으뜸이 친왕이고 그 다음이 공작과 후작이며 그 다음이 일품"이라고 언급하는 내용이 나온다. 즉 명나라의 친왕은 조선의 대군·공주·왕자군·옹주처럼 무품이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내용이 명 실록이나 명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러한 점 때문에 이를 처음 문학 작품에서 대중적으로 두드러지게 인지시킨 [[김경진(소설가)]]이 이순신이 명량해전 직후 명나라 도독 품계를 받아 진린 등 명나라 장수들이 계급적으로도 하급자가 되었으며, 선조와 동급이 됨으로써 선조가 이순신을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는 주장을 계속해서 이야기 했지만, 정작 수여를 했다는 명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명사(明史)와 명실록(明實錄)에는 이순신에게 도독직을 생전이건 사후건 내렸다는 얘기 자체가 수록되어 있지 않다. 통영 충렬사에 소장된 도독인(印)의 글씨체도 다른 명나라 도독인의 글씨체와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무시할 수 없었다. 아래 기사 인용문을 보면 충무공 도독인과 다른 명나라 도독인 사이에 차이점이 30개나 있다고 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명 도독직 수여 자체가 병자호란 후 어느 시기에 숭명 사상에 따라 조선 측에서 만든 조작일 가능성도 검토하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96&aid=0000342017|또 도독인 등 팔사품 자체가 명 조정의 하사품이 아니라]][[http://www.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465821| 진린의 개인적 선물일 가능성이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단, 이 가설을 정설로 채용하면 정조를 비롯한 후대의 조선 임금들은 이순신을 높이면서 자기 조상인 선조를 깎아내린 패륜을 저지른 셈이다, 받지도 않은 도독직을 사칭한 것을 명나라가 알면 가만 있었겠느냐는 반론도 나오고 있다. 하지만 유명수군도독이라는 직책은 시대순으로 나열하면 먼저 대동법으로 유명한 효종 대 영의정을 지낸 [[김육]]이 지은 충무공 신도비문에서 첫 등장하는데 효종 시대는 알다시피 명나라는 이미 망했고 효종이 북벌을 준비하던 시대이다. 그리고 조상을 깎아내렸다고 하는데, 기록의 나라인 조선이지만 기록이 너무 방대하다보니 기록이 있음에도 후대에 가서 전혀 엉뚱한 이야기를 믿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를 들어 예종의 후궁인 공빈 최씨가 어느 시점부터 최씨 문중에서 문종의 계비라고 잘못 주장하며 국가에 추숭을 요청하여 조정에서 이를 거부한 일이 영조, 정조, 고종 때에 거듭하여 일어났다. 또 다른 예로 태종 이방원을 호랑이로부터 구한 무사 [[김덕생]]이 실제로는 태종에게 큰 상을 받았으나, 후대에 어느 시점에서부터 김덕생이 임금을 향해 활을 쏜 죄로 공을 세우고도 억울하게 죽었다는 이야기로 이야기가 바뀌더니, 정조실록에까지 김덕생이 억울하게 죽었다고 실려버리는 왜곡이 일어났다. 물론, 전쟁 시기와는 동떨어진 예시들이지만, 효종, 정조 대에 이순신이 명 도독직을 받았다고 실렸다고 해서 정말로 이순신이 명 도독직을 받았다는 근거로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진린이 개인적으로 주었다는 해석은 진짜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 더 큰 문제이다. >(전략)상이 이르기를, >"대인의 신묘하신 계책을 힘입어 8년간의 강적이 하루아침에 섬멸되었으니 고마우신 은덕은 형용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자, 진인이 말하기를, >"한창 적이 포위해 올 때 내 배는 큰북을 치고 먼저 나아가고 등자룡(鄧子龍)과 이순신(李舜臣) 두 장수가 좌우에서 협공하였는데 그 두 장수는 다 적에게 죽었습니다. 그래도 나는 죽기를 무릅쓰고 앞으로 나아가면서 동요하지 않아 다행히 패배를 면하였으니 이 또한 운수입니다."(후략) > 선조실록 109권, 선조 32년 2월 7일 정사 1번째기사 1599년 명 만력(萬曆) 27년 전쟁이 끝나고 한양으로 돌아온 [[진린]]이 선조와 나눈 대화 중의 일부이다. 보다시피 이순신을 자신의 상급자로 인식하는 내용이 전혀 없으며, 자신의 부하인 [[등자룡]]과 동급, 잘해봐야 자신의 동급자로 인식하고 있다. 그외에도 다른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을 애도하는 대화들을 봐도 이순신을 상급자로 생각하지는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순신이 생전에 명 수군 도독을 받았고 이 때문에 명나라 장수들이 이순신에게 복종했다면 진린이나 다른 명나라 장수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겠는가? 반면에 위 이야기처럼 방대해서,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유독 선조 시기만 실록이 수정본이 있을 정도로 조작도 배제를 못 한다. 더욱이 살아생전에 노야, 이야라고 한 것도 거짓말이라고 쳐야 하는데, 이것까지 포함되어야 할까? 거기에 진린이 우리말로 했을 리는 만무하고 통역이란 것이 의도와 다른 해석을 요구하는 일이란 것을 알고 있다면, 진린의 말도 일부 의도적인 조작된 통역 혹은 서술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힘들다. 종합해보자면 현재로써는 어떤 내용이 맞는지 아무도 정확한 근거를 대지는 못하는 상황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