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일대기 (문단 편집) == 임진왜란 전야까지 == 1545년 봄에 서울 건천동 부근에서 태어났다. 이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서울)|중구]] 인현동 일대이며, 때문에 이 근처에 [[충무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년 시절에 충남 아산으로 거주를 옮겼는데, 참외를 주지 않았다고 말을 몰아 참외밭을 짓밟았다는 등의 일화로 보아 어려서는 상당한 [[개구쟁이]]였던 모양이다.[[http://blog.naver.com/ksmbingo/60115620847|#]] 공이 20세 되던 1565년에는 무관출신으로 보성군수까지 지냈던 온양 방진(方辰)의 무남독녀와 혼인하였고[* 방진이 사망한 다음 온양의 집과 재산은 전부 이순신이 상속받는다. 현재 충남 아산의 현충사 이순신 고택이 방진의 집이다.][* 민선6기 [[보성군]]수가 보성과 이순신이 연관이 많다면서 이순신을 밀어주기 시작했는데 그 이유 중 하나가 이것이다. 근데 정작 조선시대에는 상피제라고 해서 고을 지방관을 반드시 그 고을 사람이 아닌 외지인으로 임명하도록 했기 때문에 방진이 보성 사람일 리가 없다(...).][* 당시 병조판서였던 이준경이 예전에 자신의 부하였던 방진에게 이순신을 소개시켜줬다. ], 22세 즈음에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성웅의 부인답게 방씨부인도 굉장히 당차고 슬기로운 성격이였다. 가장 잘 알려진 얘기로 부인이 어릴적 밤중에 도둑이 집에 들자 명궁인 아버지 방진이 활로 응사했다. 허나 도적들은 이미 내통자가 있어 화살을 미리 치운 후 였다. 거기다가 밤중이라 시야가 좁아져 속수무책이던 상황. 그때 아직 어린 방씨가 화살은 아직 많이 있다며 한 무더기의 화살을 가져왔고 그 얘기를 듣자 도적들은 지레 놀라 도망쳤다. 나중에 알고보니 화살이 아니라 여인들이 베를 짤때 쓰는 대나무였다.] 28세 때에는 무과 별시에 응시했다가 승마 중 갑자기 말이 넘어져 낙방했는데,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서는 빈혈이었다고도 하고 이때 발목을 다쳤다거나 다리가 부러졌다고도 한다. 위인전에는 낙마한 직후 버드나무 가지로 다리를 동여매고[* 버드나무의 껍질이나 잎은 해열, 진통에 효능이 있다. 버드나무에서 나오는 성분으로 만들어낸 약품이 바로 그 유명한 [[아스피린]]이니 뜬금없는 응급처치는 아니였던 셈] 시험을 속개했으나 결국 탈락했다고 묘사되어 있다. 다시 이로부터 4년이 지나 32세 되던 1576년 2월이 되어서야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병과에서 4등을 했다. 한편 이 4년간의 공백을 소재로 다룬 영화가 [[박중훈]]이 이순신으로 분한 [[천군]]이다.], 동년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에 종9품 권관으로 부임했다. 이렇게 이순신은 국경을 수비하는 야전에서 육군 초급장교로 처음 공직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하던 초급장교 시절 <함경도일기>라는 진중일기를 남겼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는데, 사실은 이미 이 일기(단 하루치뿐이었다)가 일반인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2000년대 중반부터 실은 위조품이 아닐까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다. 다만 발견자인 노산 이은상, 그리고 이순신의 일기로 고증한 서지연구가 이종학 등이 워낙 쟁쟁한 인물이라 고민하고 있었던 것인데, 결국 몇몇 연구자들이 [[김성일]]의 유고집인 학봉전집에 실린 1579년 여행기 북정일록의 글자 몇 개를 바꾸고 날짜와 간지를 고증에 맞게 수정한 정교한 위조품임을 밝혀냈다. 이순신이 그 시기에 실제로 일기를 썼는지 안 썼는지를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현재 발견된 실제 일기는 없다. 동구비보의 권관으로 3년을 근무한 이순신은 중앙직인 훈련원 봉사로 배속되었다. 종8품의 낮은 품계였으나 이순신은 병조정랑인 서익이 가까운 사람을 특진시키려 하자 반대했고, 이 때문인지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8개월 만에 충청도절도사의 군관이 되었다. 일단은 좌천이라 할 수 있으나 이 일로 그는 이름을 알리게 됐다. 일본에 이상징후가 포착되자 선조는 능력있는 장군들을 특진시켜 배치하게 되는데 이순신도 그 중 하나로 서른여섯에 전라도 고흥 발포진의 수군만호(종4품)로 부임해서 최초의 수군 근무를 시작한다. 이 전까지 종8품 이하였던 이순신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승진을 한 셈이다. 기록상으로 보아 발포는 판옥선 2척, 사후선 2척의 소형 수군기지로 파악된다. 여기에서도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는데, 오동나무 사건[* 발포진의 관사에 수령이 오래 된 오동나무가 있었는데, 당시 이순신의 직속 상관이라 할 수 있는 전라 좌수사 성박이 이 오동나무를 베어 거문고를 만드려고 했으나, 이순신이 관사의 오동나무 또한 국가의 물건이니 사사로이 베어갈 수 없다고 제지한 일.]과 이 사건 이후 부임해 온 전라좌수사가 전임자인 서익의 말만 듣고 이순신을 해코지하려고 하다가 당시 전라 감영의 도사(都事)직을 수행하고 있던 [[조헌]]이 이순신의 실제 근무 평점을 조목조목 들먹이고 타 진포와 비교하는 식으로 정면 논파해서 이순신에 대한 평가를 고쳤다는 일화가 제일 유명하다. 어쨌든 서익과의 악연은 계속 이어진 셈이었고, 이순신은 1581년 2년 전 재직한 훈련원 봉사로 강등되었다. 이후 1583년 10월, 병마절도사 발포만호 시절 이순신을 부당하게 괴롭혔던 전라 좌수사 이용이 함경도로 전근가면서 마침 모함을 받아 파직돼 있던 이순신을 일부러 지목해서 자기 종사관으로 삼아 함경도의 권관이 되었다. 다만 이는 이순신을 일부러 괴롭히려던 건 아니고, 이용이 잘못을 뉘우치고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서였다고 [[http://blog.naver.com/yepu/220277040506|한다]]. 이 때 이순신은 여진족의 족장 울지내를 유인 작전으로 생포했다. 다만 상관 김우서의 모함으로 전공은 인정받지 못했다. 김우서는 이순신의 전공을 시기하여 상관에게 보고하지 않고 행동했다고 억지를 부렸다. 그래도 그 이후 동년 11월엔 훈련원 참군(종7품)이 되었다. 그러나 그 직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는데 당시 북방 최전방에 있다가 귀경하고 있던 이순신이었기에 이 소식은 이듬해 1월에서야 이순신에게 전해졌다. 당시의 풍습에 따라 3년상을 지낸 이순신은 사복시 주부(종6품)로 복직되었다. 1585년, 42세에 함경도 조산보 만호로 임명되었고, 1년 반 뒤에는 녹둔도의 둔전관을 겸했다. 이 때 함경도 국경에서 근무 당시 북병사 [[이일]]에게 밉보여 [[녹둔도]][* 1860년 베이징 조약 이후 러시아가 불법점거하여 현재 러시아 영토이다. 추후 통일이 되면 영토분쟁의 가능성이 높은 곳.] 전투 이후 군관 [[이운룡]], [[이경록]]과 함께 자신의 첫번째 백의종군을 시작하게 된다. 보통 1,000명 이상의 기마병에게 기습당한 상황에서 불과 수십명으로 방어에 성공하고 반격까지 감행, 절반이상의 포로를 구출해 피해를 최소화한 전투를 패전이라고 하진 않는다. '''아군 피해도 방어가 취약하니 병력을 지원해 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을 북변사 이일이 거부해서 생긴 일'''이었으며 조정에도 대략적인 전말이 알려진 것으로 보인다. 선조는 이일의 장계를 받고도 패배한 자와는 다르다고 구분짓고 장형후 백의종군으로 마무리지었다.[* 백의종군 자체는 [[보직해임]] 정도의 형벌로 장군을 병으로 강등시키는 것이 아니다.] 아래는 [[선조]]가 이일의 장계를 받고 나서 "녹둔도에서의 전투 결과는 일반적인 패배랑은 조금 다르지 않음?"이라며 두둔하면서 하는 말이다. >'''이경록(李慶祿)과 이순신(李舜臣) 등을 잡아올 것에 대한 비변사의 공사(公事)를 입계하자, 전교하였다.''' >'''“전쟁에서 패배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 병사(兵使)로 하여금 장형(杖刑)을 집행하게 한 다음 백의 종군(白衣從軍)으로 공을 세우게 하라.”''' >ㅡ'' 《조선왕조실록》 선조실록, 선조 20년 10일 16일자'' 녹둔도 전투는 조정에 이순신의 이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백의종군 석달만에 이일이 이끄는 400여명의 여진족 토벌군에 합류해 선조 21년인 1588년 1월에 일명 '신전부락 전투'로 불리는 대대적인 여진족 토벌전[* 토벌군은 전사자 없이 여진족 전투원 380명을 죽이고 여진 가옥 200여 가구를 불태웠다.]에서 추장인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생포하는 공을 세우고 백의종군을 끝냈다. 1589년 12월에 [[류성룡]]이 천거하여 [[전라도]] [[정읍]] 현감이 되었다. 정읍이 독립된 현으로 만들어진 후 최초로 부임한 현감이 이순신이다. 이순신은 임지에서 선정을 베풀어 칭찬이 자자하였다. 1590년 8월 선조는 종3품의 직책인 고사리진과 만포진의 첨사[* 만포진의 병마첨절제사는 특별히 당상관으로 임명하는 자리이다. 이 시점에서 이미 선조는 이순신을 당상관급 장수로 임명할 생각을 굳힌 듯.]로 거듭 삼으려 했으나 한번에 종6품에서 종3품(10급 승진)까지 진급할 수 없다고 논핵되어 개정되었다. 1590년부터 1591년까지 이순신의 인사발령은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고을 현감, 육해군 절제사의 직책의 발령이 계속되었다. 이런 혼란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인사발령 및 승진은 당시 조선의 급박한 전쟁 준비의 일면을 보여주는 것으로, 유능하고 실전경험 있는 장수를 최전선에 배치하기 위한 특례였다. 또한 이는 이미 이순신이 이 때부터 조정에 유망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간관들이 이순신이 관례에 어긋날 정도로 승진이 너무 빠르다고 말할 정도였다. >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6일(계미) 2번째기사 >''사간원이 전라 좌수사에 초수된 이순신의 체차를 청하다.'' > >사간원이 아뢰기를, > >"전라 좌수사 이순신(李舜臣)은 현감으로서 아직 군수에 부임하지도 않았는데 좌수사에 초수(招授)하시니 그것이 인재가 모자란 탓이긴 하지만 관작의 남용이 이보다 심할 수 없습니다. 체차시키소서." >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 >"이순신의 일이 그러한 것은 나도 안다. 다만 지금은 상규에 구애될 수 없다. 인재가 모자라 그렇게 하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사람(이순신)이면 충분히 감당할 터이니 관작의 고하를 따질 필요가 없다. 다시 논하여 그의 마음을 동요시키지 말라." 하였다. >선조 25권, 24년(1591 신묘 / 명 만력(萬曆) 19년) 2월 18일(을유) 1번째기사 >''간원이 초수된 이순신을 개차하고, 나주 목사 [[이경록]]의 체차를 청하다 '' > >사간원이 아뢰기를, > >"이순신은 경력이 매우 얕으므로 중망(衆望)에 흡족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인재가 부족하다고 하지만 어떻게 현령을 갑자기 수사(水使)에 승임시킬 수 있겠습니까. 요행의 문이 한번 열리면 뒤폐단을 막기 어려우니 빨리 체차시키소서." > >하니, (선조가) 답하기를, > >"이순신에 대한 일은, 개정하는 것이 옳다면 개정하지 어찌 않겠는가. 개정할 수 없다."하였다. 이는 불차채용이라는 방식으로 비변사가 처음 선조에게 올린 불차채용 대상자명단에는 이순신의 이름이 없었다. [* 선조 22년(1589) 1월 21일(기사) 1번째기사 "비변사에서 무인을 불차 채용한다고 하자 각 신료들이 올린 명단"을 보면 이산해, 정언신이 이순신을 불차채용 대상으로 천거했다.] 그러나 선조가 따로 몇몇 장수를 거론하여 추가시켰는데, 여기에 이순신이 포함되어 있었다. 1591년 2월에 [[선조]]는 이전의 논핵을 피하기 위해 벼슬의 각 단계마다 임명하여 제수하고 승진시키는 방법으로 정읍 현감에서 진도 군수로 승진시키고, 부임하기도 전에 가리포첨절제사로 전임하고, 곧바로 이번에도 부임하기도 전에 다시 전라 좌수사로 임명했다. 이 때 간관들이 승진이 너무 빠르다며 간하자 선조는 다른 사람의 승진은 좀 늦출 수도 있다고 하면서도 이순신의 전라 좌수사 발탁은 끝까지 고집했다. 드디어 1591년 47세로 정3품 인 전라 좌도 수군 절도사에 임명되었다. 2년만에 종6품에서 정3품이 된 것인데 이는 조선왕조에서 빠른 속도의 승진으로 이름난 [[조광조]]와 비슷한 속도였다. 조광조는 2년 4개월만에 종6품인 [[사간원]] 정언에서 정3품인 [[홍문관]] 부제학이 된다.[* 이후의 승진 속도도 비슷하다. [[조광조]]는 그 뒤 6개월만에 동지성균관사였던 종2품이 되었고 종2품은 [[삼도수군통제사]]의 품제와 같았다. 그 후 4개월 뒤 정2품인 사헌부 대사헌이 되는데 이순신 역시 1년 뒤인 1592년 [[한산도 해전]]을 계기로 정2품 상계 정헌대부까지 올라간다]. 여기에서 유성룡과 선조가 얼마다 다급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을 확신하지 않았다면 절대로 둘 수 없는 무리수였다. 전라 좌수영은 5관 5포, 즉 5개 고을[* 순천도호부, 흥양현, 광양현, 낙안군, 보성군]과 5개 전문 수군기지[* 사도진-첨사, 여도진-만호, 녹도진-만호, 방답진-첨사, 발포진-만호] 소속 병력을 지휘 하에 두고 있었으며, 이순신은 이들의 전력강화에 주력했다. 유명한 [[거북선]]의 건조도 이 때부터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순신은 전란에 대비해서 '''실전과 완벽하게 동일한 수준의 훈련'''을 꾸준히 실행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휘하 군관들의 순번을 정해서 차례대로 '''가왜장(假倭將)'''으로 임명했고 이 가왜장이 이끄는 함선이 가왜장선이 되었다. 오늘날로 따지면 대항군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순신은 이마저도 엄격하게 진행했으며 제대로 된 격식을 갖춰서 가왜장으로 임명된 군관에게는 직접 가왜장 임명서를 발급하기까지 했다. 이순신은 전란을 대비해서 [[거북선]]만 건조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실전훈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