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순신/일대기 (문단 편집) === 명량해전 당시 전과 === 일반적으로 당시 왜선의 숫자는 난중일기의 133척, 그리고 격침한 왜선은 대략 31척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에 대해선 논란이 끊이질 않고 있다. 우선 왜군 함선이 133척이었다는 기록은 실록과 난중일기의 기록이다. 그리고 이 기록은 후대에 갈수록 수치가 높아지는 경향이 있으며 정조대에 이르러서는 500척까지 불어나는 경향이 있다. 다만 '''현장에 있었던 이순신 본인이 당대에 남긴 기록'''인 난중일기의 수치가 대단히 설득력이 크고, 일본쪽 기록과도 어느 정도 교차검증이 되는 수치이다. 한편 31척을 격침하였다는 기록에 대해, 확실하게 격파된 배의 숫자만 기록했으며 실제로는 100여척을 격파 했다는 주장이 있지만 설득력이 낮다고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우선 난중일기와 선조실록에 모두 31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또한 후방에 있었을 구루지마 미치후사를 주살한 일이 100여척 격파의 근거로 들어지기도 하지만, 구루지마 미치후사는 '''선봉'''에 선 장수이고, 애초에 일본 수군이 함대를 펼칠 때 지휘관이 후방에 위치한다는 것은 일반론에서 의거한 것으로, 검증된 사항이 아니다. 특히 세키부네로 구성된 함대 중 31척을 격파했다는 내용은 당시 일본 수군 전체의 1/4이 수장되었다는 이야기고, 이는 당연히 절대 적은 전과가 아니라는 것. 이에 대한 반박도 있다. [[명량 해전]] 참고. 일단 100척 격파의 근거는 '구루치마 미치후사 주살'이 아니라, '''<고산공실록>'''에서 "'''도도 다카도라가 활에 맞아 손에 부상을 당했고 군감 모리 다카마사까지 세키부네에 타고 있다가 급히 빠른 소선으로 옮겨타 도망갔다가 바다에 빠졌으나, 다카도라 부하들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위기를 벗어났다'''"는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군감이 선봉에 선 함대도 있는가? 군감은 정치장교가 아니다. 또한 133척이라는 것도 '16일. 갑진. 맑음. 이른 아침에 별망군이 와서 보고하기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적선이 명량을 거쳐 곧바로 진지를 향해 오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곧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내리고 바다로 나가니, 적선 130여척이 우리 배들을 에워쌌다." 라는 난중일기의 구절로 보아 이순신이 일단 적 함대와 접선하자마자 직접 교전에 들어간 것만 센 것일 확률이 높으며, 난중일기에는 명량해협에 접근한 왜선 숫자를 제대로 언급한 적이 없다. 그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들어온다'고만 했을 뿐, 선조실록에서도 130척은 이진포 앞바다로 들어온 것을 센 숫자라고 나와있지 전체 척수는 나와있지 않다. 상황이 상황인만큼 왜선 전체의 숫자를 정확히 가늠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한편으로, 교차검증 부분에서는 애초에 일본 문서에는 명량 해전에 참전한 수군의 척수는 물론, 참전 다이묘도 도도 다카도라와 구루지마 미치후사 외에는 참전했는지 참전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만일 진법표에 나와있는 약 8000명의 일본수군을 토대로 60x133해서 비슷하지 않냐고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 또한 틀린 것이다. 왜냐하면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수군이 과연 수부같은 비전투인원을 계산한 것인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명량 해전]] 문서에도 나와 있지만, 비전투인원을 계산할 경우 진법표에 나와있는 일본수군만으로도 거진 1만에 가까운 군세가 만들어진다. 더군다나 14일 탐망군관 임준영의 보고에서는 적선 200여척이 확인되고 있다. 충무공의 조카 이분의 행록의 333척 기록을 믿기 힘들다고 폄하하지만, 행록의 기술은 이렇게 되어 있다. >'''그 날 피난한 사람들이 높은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 바라보니 적선이 쳐들어오는데 300까지는 헤아렸으나 그 나머지는 얼마인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 이분이 일부러 과장하고 싶어서 과장한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피난민의 증언을 충실하게 옮겼을 뿐이다. 더군다나, 500척 기술을 마치 정조대에 과장한 것처럼 아는 사람이 있는데, 정조대의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500척 이야기는 정조대의 사람들이 알아서 부풀린게 아니라 당시 피난민들의 증언에서 나온 이야기를 이충무공전서를 편찬하면서 그대로 옮겨 썼을 뿐이다.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명량 해전 참전 전체 왜군 선박수가 133척이라고 분명히 단정지을 수 없다. 결론적으로 [[명량 해전]]에서 왜선의 숫자를 완벽하게 확인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한마디로 당시 왜군의 규모를 완벽하게 알 수는 없다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당시 적의 함대는 100여 척이든 300여 척이든 500여 척이든 새까맣게 쳐들어오는 상황이고, 그런 규모의 적함을 요격하겠다고 나선 아군 함대는 고작 '''13척'''에 불과했다. 이렇게 아주 급박한 상황에서 적함이 몇 척이나 되는지 일일이 세고 있을 여유가 없지 않은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