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스탄불 (문단 편집) ===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s-2]] 비잔티온 === 신화에 따르면 '메가라'라고 불리는 도시에 비자스(Βύζας)라고 하는 [[왕자]]가 있었다. 그는 장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왕좌를 이어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새로운 식민지 도시를 개척하고자 [[델포이]]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에게 [[델포이 신탁|자문을 구하였는데]] 그녀는 '''"눈 먼 자의 도시의 반대편에 도시를 세우라"'''라고 말하였다. 이 눈 먼 자의 도시의 정체는 칼케돈(Χαλκηδών)[* 오늘날 이스탄불의 카드쾨이구]이며 이 도시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는 것. 여사제의 조언을 들은 비자스는 메가라의 개척자들과 함께 그 땅을 찾아 항해하였다. 목적지 근처에 다다른 비자스 왕자 일행은 한 땅을 발견하였는데 그 땅은 북쪽으로는 금각만이 있고 동쪽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을 끼고 있어서 [[항구도시]]의 입지 조건으로 매우 좋았다. [[흑해]] 연안에 있는 도시들은 [[지중해]]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스포루스 해협을 지나가야 하므로 이 지역의 중요성이 높다. 그래서 그들은 BC 667년 여기에 도시를 세웠고 사람들은 도시의 이름을 왕자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Βυζάντιον)으로 불렀다. 칼케돈의 개척자가 장님이라고 여겨지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칼케돈 또한 메가라 사람들에 의해 개척되었고 비잔티움 개척 이전인 BC 685년에 세워졌다. 그런데 그들은 금각만을 끼고 있어서 입지 조건이 더 좋은 보스포루스 해협 서쪽을 개척하지 않고 해협 동쪽에 도시를 세웠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칼케돈을 세운 집단들이 도시를 해협 서쪽에 건립하는 것의 이점을 "보지 못하였다"라고 판단하여서 개척자를 장님이라고 여기게 된 것. 그 후 이 도시는 바다와 바다를 낀 항구도시로 발전한다. 그리스 상인을 위한 지역 거점의 역할을 하던 이 도시는 동시대 사람들한테는 그 방탕함과 해이함으로 악명이 높아 어느 여행자는 비잔티움 사람들을 두고 "술독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깠다고. '''죄악의 도시'''([[신 시티|Sin City]])라는 별명으로 금욕적인 사람들에게는 거의 [[소돔]]과 [[고모라]] 취급을 받는 [[라스베가스]] 같은 이미지였던 듯하다. 비잔티온은 BC 491년 [[다리우스 1세]] 치세의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가 점령하였으나 BC 477년 [[고대 아테네|아테네]]를 위시로 한 [[델로스 동맹]]에 다시 탈환되어 그리스계 도시로 쭉 남았다. 기원전 340년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2세]]의 포위공격을 격퇴해내기도 했다. 이후 기원전 150년에 [[로마 공화국|로마]]에 공납을 바치는 대신 자치권을 보장받는 형식으로 로마의 질서에 편입되었고, 오랫동안 독립적인 위치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원후 193년 [[다섯 황제의 해]] 당시 경쟁구도였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와 [[페스켄니우스 니게르]] 중 지중해 동부 세계의 지지를 받고 있던 후자의 편을 들어버리는 악수를 두고 만다. 이때 비잔티온은 여느 동방 도시들과 달리 니게르를 적극 지지한 터라,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진영에 [[반역향]]으로 크게 찍혀버렸다. 이미 이 때에도 특유의 촘촘한 방어력은 발휘되고 있었던 것인지, 포위공격은 3년을 끌었고 세베루스의 분노를 돋우게 된다. 결국 196년에 비잔티온은 함락되었고, 주민들은 반역자 취급을 당하고 지역 유지들은 처형됐으며[* 이때 비슷한 혐의로 지역 유지들이 처형되고, 주민이 약탈, 강간, 폭력 등 피해를 입고 엄청난 세금을 강탈하듯 빼앗기며 고생한 동네가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터를 잡고 근거지로 삼은 루그두눔([[프랑스]] [[리옹]])이다.] 도시는 약탈과 파괴를 당했다. 하지만 워낙 좋은 땅이었기 때문에[* 특히 세베루스의 장남인 [[카라칼라]]가 비잔티온의 재건을 적극 주장했다.] 세베루스 황제 치세 때 다시 재건되었다. 당시에도 비잔티움(비잔티온)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거점이자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거점, 그리고 난공불락의 요충지로 잘 알려진 무역 도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후의 찬란한 명성과는 달리, 당시의 비잔티움은 인구 100만의 수도 [[로마]]나 인구 50만의 [[로마 제국|제국]] 제2의 도시 [[알렉산드리아(이집트)|알렉산드리아]]는 말할 것도 없고, 하다 못해 아테네나 [[테베]]처럼 영향력 있는 폴리스가 된 적도 없으며, 오히려 지금의 '''튀르키예 수도'''인 [[앙카라]]가 더 큰 도시였다. 평범한 무역 도시였던 이 도시의 운명을 완전히 뒤바꾼 사람은 바로 '''[[콘스탄티누스 1세]]'''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