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승만/일생 (문단 편집) ==== 태평양 전쟁 시기 ==== || [[파일:싱먼리외교위원장.jpg|width=100%]] || [[파일:appointment letter indicated Syngman Rhee as a chief of Korean Commission in Washington.jpg|width=100%]] || || 주미외교위원장 시절, [[뉴욕]]에서. || 1941년 6월 4일, [[김구]] 및 외무부장 [[조소앙]] 명의로 발급된 [[임시정부]] 주미외교위원장 그리고 주미 [[특명전권대사|전권 대표]]로 임명한다는 사령장. || 1939년 말, 동지회의 이원순 씨 등의 조언으로 [[한인]]들의 [[한국 독립운동|독립운동사]]에 관한 저서를 집필하여 해외에 거주하는 동포들과 세계 각 국민들에게 한국 독립에 대해 [[여론]]을 환기시키고자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워싱턴]]으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당초 [[독립운동]]에 관한 책을 쓰려했던 계획은 [[중일전쟁]]의 불똥이 [[미국]]으로 튈 조짐이 보이자 그는 이에 대해 경각심을 울려야겠다는 생각으로 1941년 6월, [[일본 제국|일본]]의 미국 침략을 예고한 [[일본내막기]]란 책을 출간하였는데 초기에는 오히려 전쟁을 도발하는 책이라며 비난을 받았으나, 실제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한인 사회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 이승만의 명성이 높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승만은 미국과 일본이 충돌하는 이 시점이 바로 한국에겐 기회라 생각했다. 그는 워싱턴에 주미 외교위원부를 다시 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로부터 주미외교위원장에 임명되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코델 헐]] [[국무장관]]의 [[극동]] 담당 비서 알저 히스(Alger Hiss)와 스탠리 혼백(Stanley K. Hornbeck) 극동 국장을 만나서 한국이 [[사보타주|사보타쥬]]와 [[게릴라]] 활동으로 대일 전쟁을 강화할 수 있도록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를 승인하고 군사 원조와 경제 원조를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현 시점에서 [[동북아]]의 커다란 이해 관계를 일으키는 정치적인 문제 제기는 시기 상조라고 거절하였다.[* 앨저 히스의 답신 전문 "잘 알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이 단계에서 [[미국]]이 한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독립 정부]]를 승인한다면 [[북아시아]]에 커다란 이해 관계를 가진 '''[[소련]]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것'''이며, 소련이 아직 [[일본]]과 전쟁 상태에 있지 않는한 그 지역에서의 어떤 정치적인 문제의 계기는 시기 상조라고 생각합니다." 이 답변을 받은 [[이승만]]은 막중한 권력을 가진 젊은이가 미국을 위해서보다 소련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b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177-180] || [[파일:TheKoreanLibertyConference1942.jpg|width=100%]] || [[파일:한미협회.jpg|width=100%]] || || 1942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워싱턴의 호텔 라파예트에서 개최되었던 '한인자유대회'.[* 이승만은 맨 뒷줄 중앙에 서있고 같은 줄 왼쪽 끝에 [[서재필]], 그리고 오른 쪽에서 세 번째로 호머 헐버트 선교사가 보인다. 앞줄 왼쪽의 첫 번째 여성은 [[중화민국|중국]] 선교사 핏치 부인이고, 한 사람 건너가 [[프란체스카]] 여사이다.] || [[한미협회]] 만찬회 모습. 왼쪽 끝이 [[이승만]], 오른쪽 끝에서 두번째가 [[호머 헐버트]] [[선교사]] || 이승만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루즈벨트 대통령]]를 비롯하여 [[미국 국무부|미 국무부]] 등을 상대로 임시정부를 공식 인정 받기 위해 많은 애를 썼지만 잘 되지 않았고, 한계를 느낀 그는 미국 내 여론을 움직이기 위해 미국의 여러 지도층을 중심으로 [[한미협회]]를 발족했다. 수십년간 자신과 함께해준 스태거스 변호사와 윌리엄스 기자, [[아메리칸 대학교]] 총장 더글라스와 [[호머 헐버트]] 박사, 그리고 로버트 올리버[* 후에 이승만의 정치 자문가가 된다] 등이 한미협회에 참여했다. 이 협회를 중심으로 [[1942년]] [[3월 1일]], [[3.1 운동]] [[기념일]]을 기해 [[이승만]]은 [[워싱턴]]에서 전승 축원을 위한 '한인 자유대회(The Korean Liberty Conference)'를 열었다. 동년 [[3월 6일]], [[한미협회|한미우호협회]]는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즉시 승인과 [[연합국]]에 가담시킬 것을 촉구하는 장문의 성명서를 보냈다.[*b] [[1942년]] [[5월 15일]], 이승만은 미국의 전쟁 활동에 적극 협력하겠다는 임시정부의 전문을 동봉한 다음과 같은 공한을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보냈다.[*b] >루즈벨트 대통령 각하, 나는 [[중경]]에 망명 중인 한국 임시정부로부터 받은 동봉 전문 메세지를 각하에게 전달할 영광을 가지려 합니다. 이 메세지는 2,500만 한국 인민의 민족적 감정을 표현하고 있으며, 나는 그것이 각하의 특별한 고려를 받을 가치가 있음을 확신합니다. > >지금이야말로 미국이 과거 38년간 한국 인민과 한국에 대해서 저질러진 잘못과 부정의를 시정할 시기라는 사실에 각하의 주의를 환기하는 바입니다. 각하께서도 상기하실 것이지만 미국은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한미조약]]에 위반하여 [[1905년]]에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1910년]]에는 [[한일병합|한국을 병합]]하도록 허용하였습니다. 각하께서 한 연설에서 언급하였던 바와 같이 그 이래 한국 인민은 전세계의 모든 피정복 민족보다 더한 그리고 더 오랜 고통을 겪어 왔습니다. 한국의 파괴는 일본의 정복 계획의 개시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동경]]의 [[군국주의]]자들의 손에 하나하나 먹혀 들어간 국가를 여기에 다시 열거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 >[[1941년]] [[12월 7일]] 이래 일본 도국 민족의 폭력으로부터 [[문명]]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미국인]]의 피가 흘려졌고, 얼마나 많은 금전이 사용되었습니까? 이 모든 것이 [[서방권|서방]] [[정치인|정치가]]들이 [[동양]] [[평화]]의 보루로서의 독립 한국의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온 것입니다. 이 정치가들은 지난 여러 세기동안 일본의 침략을 몇 번씩이나 격파한 것이 [[한국인]]이었다는, 오직 한국민만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하였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미국]]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 >[[소련]]이 종전 후 한국에 '소비에트 조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의 [[극동]] 진출을 막고 현재의 대일 전쟁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당장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인]]들을 [[태평양 전쟁|대일 전쟁]]에 참전시켜 실질적으로 미국을 도울수 있게 해야합니다. 따라서 현재의 전쟁 노력을 촉진하고 [[태평양]] 장래의 평화를 안전화하기 위하여 나는 각하에게 이제 간청하노니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우리의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일본]]과의 싸움에 한국인이 정식 가입함으로서 미국에 실질적인 봉사를 할 수 있도록 모든 원조와 고무를 주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 >ㅡ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 구미위원부의 미국 명칭.] 위원장 이승만 라는 내용의 서한을 보내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긴 미국의 책임을 묻고 일제의 대한제국 병합에 미국이 손놓고 있었던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 이어져서 현재 미국이 엄청난 병력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임시정부를 공식 인정하여 한국이 참전하게 하라고 설득했다. 며칠 후, 루즈벨트 대통령 비서 왓슨 소장으로부터 "세밀한 주의를 받았다."는 짧은 답신[* 왓슨 소장의 답신 전문 "친애하는 이 박사! 대통령의 지시에 의하여 나는 귀하가 한국에 관한 제문제를 논의하고 그것과 더불어 [[조소앙]] 씨로부터의 전문 사본을 동봉한 [[1943년]] [[5월 15일]]자 귀하의 서한을 받았음을 알려 드립니다. 나는 귀하의 서한과 동봉한 전문이 세밀한 주의를 받았다는 것을 표명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ㅡ 에드윈 M. 왓슨]을 받았으나 실효를 거둘만한 것은 없었다.[*b] 이 외에도 이승만은 미 법무장관 프랜시스 비들에게 미국내 [[한국인]]을 적국인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것을 요청했다. 그 결과 1942년 2월 9일 프랜시스 비들은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등록한 한국인 가운데 자의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에 한해 적성국 외국인에 가해지는 규제에서 특별 면제한다고 발표'''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도 일선 군 지휘관들이 미국내 한국인을 일본인과 같이 적성국민 취급하는 일이 발생하자 1943년 3월 30일에 이승만은 미 육군장관 스팀슨에게 시정을 요구했고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한국인들에게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어 한국인들을 보호하였다. 1942년 6월부터 이승만은 [[미국의 소리]](VOA) 단파 방송망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독립 운동을 격려하고 국제사회의 소식을 알리는 방송활동을 했다.[* 일제 말기 식민지 조선에 있던 [[여운형]] 또한 이 미국의 소리를 통해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황소식을 듣고 있었다.] 한국어 방송은 1942년 8월 처음 방송되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단파방송 밀청사건|항일단파방송 사건]] 참고. 1943년 이승만은 미국에게 반(反)소련전선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 해 11월, 12월 [[카이로 회담]]에서 연합국은 한국을 '적당한 절차'에 따라 독립시킨다는 것을 발표했다. 비록 이승만은 '적당한 절차'가 신경 쓰였으나 미국 정부에 요청해도 자세한 내막을 파악할 수 없었다. 후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신탁통치]]에 관한 이야기가 오고 가긴 했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미국의 전략첩보국 [[OSS]] 부국장인 굿펠로우를 만나서 '''대일전쟁 첩보부대에 한국인들을 참여시키고자 했다'''. 진주만 기습 공격 이후 OSS는 1942년 1월 24일 한인들을 OSS 대원으로 훈련시키기로 결정했고, 백범 [[김구]]와 접촉했다. 이후 6월부터는 미국에 있던 이승만과 굿펠로우는 OSS를 통해 한인병사를 양성하고자 했는데, 초기의 계획은 "일본어에 능통한 한국인 청년 100여 명을 선발해 소정의 비밀 훈련을 마친 후 적당한 시기에 임무를 수행케 한다는 것"이었다. 이 OSS 대원이 된 인물에는 [[유일한]][* [[유한양행]] 창업주], [[장기영(1903)|장기영]][* 후에 [[서울특별시장]]이 된다.], [[장석윤]][* 후에 내무부 장관이 된다.] 등이 있다. OSS는 김구의 [[광복군]]과 협력해 한인들을 선발하는 독수리 작전을 세웠고, 미국에서 직접 소수의 한인 특공대원을 뽑아 한반도에 투입하는 [[냅코 프로젝트|냅코 작전]]도 실시했다.[* 정병준에 따르면 이들은 30대 중반이었기에 징집대상이 아니었고 연령도 많았지만 한국독립을 위한 방편으로 OSS를 선택했다고 한다.] 이 때 이승만이 추천한 50명 정도가 OSS에 가담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에 있는 산타 카탈리나 섬에서 유격훈련, 무선훈련, 폭파훈련, 촬영훈련 등을 하며 대일전을 준비했다.[* 참고로 이때 OSS 소속으로 작전을 준비하던 과정은 이후 여러 대중 매체에서 묘사된다. 소설 [[태백산맥(소설)|태백산맥]]의 주인공인 김범우도 OSS [[훈련]]을 이수한 [[먼치킨(클리셰)|먼치킨]]으로 그려지며, [[드라마]] 서울 1945의 주인공인 이동우 또한 2차세계대전 막바지에 OSS에 들어가 카탈리나 섬에서 훈련 받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이 모든 작전은 1945년 8월 [[리틀보이|원자]][[팻 맨|폭탄]] 투하 후 일본이 무조건 항복하면서 실행되지 못했다. 이승만은 1945년 4월부터 열린 [[유엔]] 창립총회에 참관인 자격으로라도 참석하여 독립 보장을 받으려했으나 잘 되지 않아서 사무국과 각국 대표들에게 카이로 선언의 기본정신에 따라 임시정부를 즉각 승인할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보냈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무산되자 "[[얄타 회담]]에서 전후 한반도를 소련의 영향력 하에 두기로 했다." 라는 미·영·소 3국 간의 이른바 '얄타 밀약설'을 폭로하여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며 한국이 [[가쓰라-태프트 밀약]]에 이어 또다시 비밀 협약의 희생물이 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은 미국 상하원 외교 분과 위원장들에게 얄타 밀약을 항의하는 전보를 보냈고, 트루먼 대통령에게 한국을 비밀협약의 희생양이 되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줄 것을 호소하는 서한을 보냈다. >한국에 관한 카이로 선언에 위배되는 얄타에서의 비밀 협정이 최근에 밝혀짐으로써 대통령께서 크게 놀라셨을 겁니다. 비밀 외교에 의해 한국이 희생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1905년 한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밀약은 20년 동안이나 비밀에 부쳐졌습니다. 다행히 얄타협정은 바로 이곳 유엔 창립 총회 도중에 밝혀졌습니다. 과거 미국이 저지른 잘못을 바로잡고, 3000만 한국인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통령께서 이 상황에 개입하시기를 호소합니다.[* [[https://www.chosun.com/national/weekend/2023/06/24/MSDQQE7LTVGYFOKFNFSOEKF2IM/|#]]] > >ㅡ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 위원장 이승만 당시 이승만이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 사무실에 보낸 편지에는 "당시 우리는 세계 지도자들이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속수무책이었으나, 지금 우리는 이 사실을 캐냈으므로, 세계에 양심이란 게 남아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깨어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적었다. 미국 국무부는 사실무근이라며 부정하였고, 공식 성명을 통해서 얄타 회담에서 한국의 독립을 침해하는 어떠한 비밀 협정도 체결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영국 하원에서 얄타밀약설에 관한 질의를 받은 처칠 또한 아무런 비밀협약이 체결되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3국 정상이 비밀협정의 존재를 부인하는 성명을 발표하라고 요구하였다. 실제로 그 당시 신탁통치를 미국이 찬성했고, 소련에 대일참전을 요구하여[* 물론 소련도 독자적으로 만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미국입장에서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출혈이 컸기 때문에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 소련을 다그친 것.] 3달 후 [[만주 작전]]이 실행됨으로써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음이 밝혀졌다.[* 특히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후임인 [[트루먼]]과 달리, 그다지 소련을 견제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승만의 의도는 얄타회담의 정상들이 비밀 협정이 없었다고 부인하고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고 재차 확인시켜주는 언질을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실제로 미국 국무부가 얄타밀약설은 거짓 소문에 바탕으로 두며, 카이로 선언에서 천명된 한국의 독립은 충실히 이행될 것이라고 확인하면서 이승만은 그의 목표를 달성하게 되었다. 1945년 9월 초, [[존 리드 하지|하지 중장]]이 진주군 사령관으로서 [[인천]]에 상륙할 때쯤, 로버트 올리버 박사는 한국에 대한 [[소련]]의 야망에 [[신경쇠약|신경과민]]이 되어 있는 [[이승만]]을 찾아가 친구로서 그가 추구하고 있는 "극단적" 침로에 대한 근심을 표명하였다. 그는 [[워싱턴]] 워드먼 파크(Wardman Park)에서 이승만 부부와 함께 식사를 하였다. 식사가 끝난 후, 올리버는 자기의 의견을 지극히 조심스레 이야기 하였다.[* 許政, 《雩南 李承晩》, 太極出版社, 1970, p. 201-202] >'''올리버''' : 한국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세력권내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소련과 협력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정세는 [[한반도|반도]]에 [[공산당]]과의 연립 정부를 세워야 할 것이 필연적인 사실로 되고 있습니다. 만일 당신이 현재와 같은 태도와 고집을 버리지 못한다면 [[연립정부|연립 정부]]로부터도 배척되고, 결국 [[조국]]의 [[독립]]을 얻기 위하여 한 평생 투쟁한 것이 허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 >잠시의 침묵이 흐른 뒤 [[이승만]]은 무겁게 입을 열었다. > >'''이승만''' : 당신도 아시겠지만 나는 조국을 위하여 일생 싸워 왔습니다. 그러한 내가 개인의 지위를 위하여 조국을 소련에 맡기도록 꾸며 나갈 수가 있습니까? [[프란체스카 도너|아내]]와 나는 오랫동안 [[고국]]에 돌아가 [[국민]]과 재회할 것을 꿈 꾸었습니다. 수백만의 [[동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국]]이 [[식민지|노예화]]되는데도 그들을 속이고 그들에게 [[독립]]을 주기 위해서 돌아왔노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되면 조국에 대한 나의 일은 끝입니다. 그러나 나는 될 수 있는 한 계속하여 [[미국|그들]]의 잘못을 [[경고]]할 작정입니다. 파멸해가고 있는 것은 한국만이 아닙니다. 소련의 [[세계 정복]]에 대항할 수 있는 국민은 [[미국인]] 뿐이므로 [[미국]]은 타국보다 더한 타격을 받을 것입니다. 나의 임무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태를 미국인에게 그대로 알리는 것 뿐입니다. 우리들은... > >그는 격한 감정을 누른 채 웃으며 부인을 돌아 보았다. > >'''이승만''' : 우리들은 언제든 시골에 은퇴하여 닭을 치며 조국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을 것입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