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승만/일생 (문단 편집) === 초대 대통령 재임기 === || [[파일:대한민국 초대 내각 기념 사진.png|width=100%]] || || 1948년 8월 5일, 첫 [[국무회의]]를 마친 '''[[대한민국]] [[이승만 정부|초대 내각]]'''. 앞 줄 왼쪽부터 [[전진한]]·[[임영신]]·[[안호상]]·[[이인]]·[[이범석]]·[[이승만]]·[[윤치영]]·[[김도연]]·[[조봉암]]·[[장택상]]. 뒷 줄 왼쪽부터 [[윤석구]]·[[김동성]]·[[민희식]]·[[유진오]]. || 사람들의 막연한 인식과 달리 이승만 정부의 초대 내각은 [[친일반민족행위자|친일파]] 출신인 [[윤치영]]을 제외하고 모두 [[독립운동가]] 출신들이었다.[* 그나마 윤치영도 원래 독립운동가였다가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해 친일로 변절하는 항일인사들이 속출했던 1930년대 말에 변절하였던 케이스다.] 그리고 초대 내각에는 다양한 당파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되었다. 한민당은 자기 당 출신이 내각에 2명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부에 강한 반감을 드러냈다. 이승만은 [[이윤영]]을 초대 [[국무총리]]에 지명했다. 이윤영은 이북 출신이고 [[조만식]]과 [[조선민주당]]을 이끌었었기 때문에 후에 남북통일을 위해서 이북동포들의 힘을 얻기위해서 지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제헌 국회]]는 이에 크게 반발했고 결국 부결되었다. 그 후 [[이범석]]이 초대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에 임명되었다. 이승만은 초대 농림부장관에 자신과 반대되는 좌익 인사인 [[조봉암]]을 임명했다. 이는 지주계급인 한민당을 견제하고 농민들의 시급한 문제인 [[농지개혁법|토지개혁]]을 해야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북한이 시행한 토지개혁에 남한의 농민들이 불만을 느끼고 사회주의가 퍼지는[* 북한의 토지개혁은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한 '''무상몰수 무상분배'''였다.] 것을 우려했으며, 이에 따라 1950년 3월에 '''[[한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농지개혁법]]을 단행'''[* 남한의 농지개혁 방식은 농지만 대상으로 한 '''유상매수 유상분배'''였다. 물론 당시 산업시설이라는 것이 드물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토지는 농지였다.]하여 광복 이후에도 여전히 남아있던 지주제를 혁파하고 농민들의 불만을 해소하는데 성공한다.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 전쟁]] 초반의 패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북한이 전쟁 초기 남한 농민들에게 선전한 토지분배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얻어낸 토지를 뺏어서 옆집 빈둥거리는 녀석이랑 똑같이 공짜로 나눠주겠다는데 어떤 농민이 환영할까. 그리고 국민 절대다수가 농민인 이 시기에 [[농심]]은 곧 민심이자 여론이었다. 한마디로 농지 개혁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닌 대한민국의 안보 정책이기도 했다. 이 농지 개혁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형태의 토지 개혁으로 이 과정에서 토지 가격은 폭락하고, 지주들에게 땅을 매입하고 나중에 토지의 값을 지불하겠다는 [[유가증권]]을 주었는데, 이 유가증권은 6.25 전쟁 등을 거쳐서 완전히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지주들의 몰락과 농민층 분해, 근대적 자본가의 성장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정치적으로는 반대 정파인 [[한국민주당]]을 약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한민당의 중심 세력이 [[지주]]들이었기 때문.] 1948년 10월 19일에는 [[여수시|여수]]와 [[순천시|순천]]에 주둔 중이던 14연대의 좌익 군인들이 [[제주 4.3 사건|제주에서 일어난 반란]]을 진압하러 가는 것을 거부한다는 명목으로 대한민국의 분쇄를 내세우며 군사반란을 일으킨 [[여수·순천 10.19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1949년 소련의 스탈린 정부가 핵개발에 성공하고, [[중국 대륙]]도 내전에서 모택동이 승리하여 [[국부천대|공산화되면서]] 이승만은 철저한 [[반공]] 노선을 지향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승만은 국가보안법을 제정하여, 이런 공산주의 반란세력을 탄압하는 걸 가속화했고 1949년까지 감옥에 수감된 이가 10만 명을 넘어섰다. 이러한 숙군작업 없이 그대로 6.25 전쟁이 일어났더라면 내부에 수많은 반란군과 간첩들을 안은채로 전쟁을 치를뻔 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희생당한 억울한 민간인들도 있다는 점은 이승만의 대표적인 과오로 남아있다.] 1949년 초 [[반민특위]]가 출범했고 [[친일반민족행위자]] 7,000여명 중 682건을 조사해 305명을 체포했다. 그러나 거리에서는 반민법 반대 관제 데모들이 벌어졌다. 6월 6일에는 경찰이 '''반민특위를 습격하여 위원 35명을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후 반민특위는 급격히 위축되었다. 국내 기반이 미약했던 이승만은 친일 전력이 있는자들을 등용하였다.[* [[김구]] 역시 공산주의를 혐오하여 친일 전력이 있는 인물들로부터 협조를 받았다. 김구가 사망 직전까지 머물던 [[경교장]]도 친일 재벌 [[최창학]]이 헌납한 [[건물]]이었다. 거기다 친일파는 해외 등지를 떠돌아다닌 독립운동가와 달리 국내에 완전히 자리잡았기에 한국의 [[정치]], [[행정]], [[경제]] 등 국내사정 전반에 정통했으며 적은 사례지만 독립운동도 지원했으며 정부에 자금 후원도 가능할 정도로 재력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반소반공의 전진기지로 활용하려던 반공국가 미국에게도 친일파 청산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더글러스 맥아더]]가 뿌린 '맥아더 포고령'을 보면 잘 알 수 있는데, 대놓고 '''현재의 관청을 통해'''라고 명시했다. 미국이 들어오기 전에 [[일본 제국|어떤]] [[친일반민족행위자|놈들이]] 관청을 장악했는지 아는 사람들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군국주의 체제의 버팀목이었던 우익 정치인과 고위 관료, 군인들(그리고 이들의 친인척과 후손들) 상당수가 1952년 공직추방령 해제 이후에 그대로 복귀하였고 미국도 [[공산주의]] 타도를 위해 아군이든 적군이든 가리지 않는다는 [[실용주의]]적 포용 하에 이것을 묵인하였다. 미국이 친일파를 포용한 것도 이와 연관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 이들은 [[자유민주당(일본)|자유민주당]]과 [[요미우리 신문]]을 중심으로 결집해서 다시 일본 사회의 주류가 되었으며, 현재 문제가 되는 일본 사회의 우경화와 침략 행위 [[미화]]도 여기에서 기원한 것이다.] 이승만은 1949년 2월 반민특위 활동이 위헌이라는 담화를 발표했다.당시 반민특위 위원장이던 김상덕을 비롯한 반민특위 활동가들은 이승만과 대립했으며, 특히나 악질 친일경찰인 노덕술 구속을 둘러싸고 갈등과 대결이 첨예화됐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편인 경찰은 5월 하순 이른바 국회프락치사건이라 하여 국회의원 이문원과 최태규 등 4명을 전격 구속하면서 이들일 남로당 프락치라고 발표하며 사건을 조작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해체하기 위해 신익희 국회의장과 김상덕 위원장을 경무대로 불러 노덕술 석방을 종용했고, 6월 6일에는 내무차관 장경근을 동원하여 궁극적으로 반민특위를 습격하고 해체하기에 이른다. 이러한 반민특위 흔적의 제거 과정을 한국전쟁 중인 1951년까지도 끊임없이 진행했다. 1951년 2월 8일 국무회의에서는 반민특위 관련 임시조치법 폐지 건을 재차 논의했으며, 2월 14일 반민족행위 재판기관 임시조치법이 폐지됨으로써, 친일파 청산은 단 한 명도 처벌하지 못한 채 끝이 났다.[* 김삼웅, 독부 이승만 평전, 책보세, 2012, 213~216쪽.] 그러나 일본 자체에 대해서는 '''[[이승만 라인]](평화선)'''으로 대표되는 [[독도]]와 [[이어도]], [[대한해협]]의 해양주권 절대 사수라는 초강경 외교노선을 견지하였다. 이승만은 긴급명령을 내려 평화선 내 바다에서 조업활동을 하던 일본 선박들을 나포하게 하였고 이 과정에서 도주하던 선박을 격침시킬 정도로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6.25 전쟁]] 시기에는 [[맥아더]]가 일본군 파병에 대한 의중을 떠보는 것이 귀에 들어오자, 일본군이 한국에 들어온다면 총부리를 공산군에서 일본군으로 돌리겠다며 절대 반대하는 등 임기 내 일본에 대해서는 초강경 태세를 유지하였다. 1950년 5월에 있었던 [[2대 총선]]에서 이승만 계열 정당은 210석 가운데 개헌 저지선에도 못 미치는 57석을 확보하는데 그치는 대 참패를 겪었고 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의원에 당선되었으며 남북협상파 역시 대거 의회에 진출하였다. 그리고 곧 이승만의 대통령 생활 최대 위기가 터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