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승만/평가 (문단 편집) ===== 개관 ===== 이승만은 국외에서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서 노선으로서는 외교 독립론을 견지했다. 이승만은 한국 독립에 영향을 주는 여론을 미국 내에서 만들었고, 그가 미국 내에서 지지를 쌓아갈 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한국에 무지했던 미국 내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처리에 영향을 주는데 기여를 하였다. 외교 독립 노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외교 독립 노선이 성과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같은 잣대로 따졌을 때 무장 투쟁도 성과가 없었던건 어차피 마찬가지다. 무장 투쟁이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으려면 무장 투쟁으로 한국이 일제를 무너뜨리기라도 했어야 한다. 이승만이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갈등을 일으켰다는 말도 궁색한 게, 이 시기 서로 안 싸운 개인/단체는 없다시피 했으며 오히려 무장투쟁 독립운동가끼리 암살과 총질까지 해대는 판국이었다. 애초에 광복은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더불어 외교론, 무장 투쟁론, 실력 양성론 등 여러 독립운동 노선의 성과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임시정부의 노선 역시 외교론에 무장 투쟁 노선을 결합한 형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941년 '[[일본 내막기]]'라는 책을 저술해 일본에 대해 순수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알렸다.[* 발간 당시에는 별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몇 달 뒤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 [[3.1 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도 이승만이었다. 그 이전 대한제국 시절이던 1898년 4월에는 [[매일신문(1898년)|매일신문]]이라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2년 앞선 1896년 창간되었으나 주 3회 발간됐기 때문에 일간지는 아니었다. 독립신문이 일간으로 바뀐 시점은 1898년 7월로 매일신문보다 늦다.]을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창간했다. 순한글 신문이었으며 민족의 대변지로 한글신문시대에 기여하였고,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요구와 횡포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했다.[[https://nl.go.kr/newspaper/sub05.do?paper=%EB%A7%A4%EC%9D%BC%EC%8B%A0%EB%AC%B8_%E6%AF%8F%E6%97%A5%E6%96%B0%E8%81%9E|#]] 후에 [[제국신문]]도 창간했다. 그리고 [[105인 사건]]이 벌어지자 미국 각지를 돌며 '조선에서 저렇게 일제에 의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이어지고 있는데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은 왜 가만히 있느냐. 조선을 도와야한다'라며 미국내 여론 조성을 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을 비롯한 고위층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 [[국제연맹]] 총회, 워싱턴 군축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에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국의 실상과 독립 문제를 알렸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미국내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 취급을 받았는데 이승만이 미 법무장관 프랜시스 비들에게 미국내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것을 요구하여 실제로 비들은 1942년 2월 9일에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등록한 한국인 가운데 자의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에 한해 적성국 외국인에 가해지는 규제에서 특별 면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승만 덕분에 미국 내 한국인들이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항일단파방송 사건]] 등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어 방송을 직접 진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해가는 전쟁 상황을 고국의 동포들에게 전달하고 독립 운동을 독려했다. 또 미국 국무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것도 이승만이며, 한국인들을 연합군에 편입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하도록 하여 독립권을 얻어내려고 했다. 이승만은 [[OSS|미국육군전략사무처(OSS)]]의 굿펠로우 부국장을 만나서 한인 특공대원들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게릴라전 계획도 추진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은 일제의 핍박을 받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누군가 반드시 해주어야 할 외교 활동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실천했다. 총칼을 드는 것 역시 독립운동이지만, 교육이나 언론 등의 수단으로, 혹은 외교적 방법으로 외국에서 일제의 침략을 알리고 주권 회복을 위해 일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다. 이승만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케이스로,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던 일부 인물들과 달리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수행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