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승만/평가 (문단 편집) ==== 일관된 반일 행보 ==== 이승만을 비판하는 한국의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이승만이 친일파라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한다. 일제강점기 초기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일본 군함 이즈모호 폭파 시도를 미국 당국에 고발한 것, 반민특위 해체를 명령하고 친일파 인사들을 등용하며 자신에게 반대하는 독립운동가 출신 인사들을 탄압, 처형[* 보도연맹 학살 사건 당시 독립운동가도 처형당했다.]시킨 것 등이 그 이유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제강점기에도 [[독립운동가]]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장이기도 했으며 대통령이 되고 난 1948년 이후에도 줄곧 반일 정책을 펴나갔다. 이승만이 친일파 인사들을 등용하거나[* 사실 광복 직후 문맹률이 78%에 달했던 상황에서 국가 운영을 위해 실무 부역자(공무원, 법조인 등)들은 울며 겨자 먹기 격으로 등용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의 친일파 청산 실패가 진짜로 비판받아야 하는 이유는 [[노덕술]], 박종표([[신상묵]]의 부하로 [[김주열]]의 시신을 유기해 [[3.15 의거]]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이다)처럼 '''없어도 국가 운영에 아무 지장이 없고 있으면 오히려 해만 될 자들까지 모조리 면벌부를 주며 등용했다는 것이다.'''] 반민특위를 해체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일본과의 전쟁까지 불사하고 해군을 동원하여 [[독도]]를 일본의 압력으로부터 지켜낸 일은 그의 강력한 반일 신념 덕분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역대 한국 대통령들 중 어느 누구도 해군을 동원해서, 더구나 발포까지 하면서 독도 영해로 넘어오는 일본 어민들을 체포해서 잡아가두는 초강수를 둔 사람은 없었다.] 더구나 당시는 [[6.25 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온 나라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심지어 북한군과 중공군이 쳐들어와 수도 서울이 두 차례나 함락되고, 나라가 망할 뻔한 절체절명의 위태로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끝내 일본과 손을 잡지 않았다. 심지어 1954년 7월 29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가진 백악관 회담에서 이승만은 한일 국교 재개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다, "내가 대통령에 있는 동안은 일본과 상종도 하지 않겠다."라고 단호하게 한일 국교 재개에 대해 반대했고, 그러자 화가 난 아이젠하워는 의자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나라인데다 북한의 침략을 막아낸 것도 미국 덕택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라는 미국 대통령의 권유를 끝까지 거부할 정도로 매우 강경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http://blog.koreadaily.com/view/myhome.html?fod_style=B&med_usrid=teddykim&fod_no=1&cid=1078757|#]]. 이를 넘어 이승만은 6.25 전쟁 시 미국이 국군을 돕기 위해 구 일본군 전력을 동원하려는 의사를 타진하자 "일본군이 한반도에 오면 '''공산군과 싸우기 전에 일본군과 먼저 싸울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까지 했다. 심지어 이승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리영희]]조차 그의 책인 "역정: 나의 청년시대- 리영희 자전적 에세이"[* 창작과비평사/ 1988년/ 370쪽]에서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반일적 고집에 골치를 앓았다."라고 서술하여 이승만의 강경한 반일 성향을 인정했다. [[북한]]에서도 이승만을 비난할 때 '친미주구 리승만역도'라고 하지 '친일주구'라고 하지는 않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