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승호(1976) (문단 편집) === [[LG 트윈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엘지이승호.jpg|width=100%]]}}} || || {{{#white [[LG 트윈스|{{{#white LG 트윈스}}}]] 현역 시절.}}} || 1999년 [[LG 트윈스]]의 2차 1순위 지명을 받아 입단한 후 쭉 평범한 [[중간계투]]로 지내다가 2003년에 포텐이 터지며 LG의 좌완 에이스로 각성하며 11승 11패, 3.1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고, 191⅔이닝과 157삼진으로 최다 이닝, 탈삼진 1위, 평균자책 2위를 차지했다.[* 1위는 3.01의 현대 용병 투수 [[셰인 바워스]]. 그리고 3위는 [[정민태]]. 그런데 바워스는 143이닝 투구에 13승 4패를 기록, [[정민태]]는 177이닝 17승 2패를 기록하였으나, 이승호는 191이닝 11승 11패를 거두었다. LG 크라이 계보의 원조격.] 하지만 이게 정말 끔찍한 혹사였던 게, 그전까지 [[중간계투]]로만 뛰면서 '''100이닝도 안 먹어 본 선수를 갑자기 200이닝 가까이 소화하게 만들었으니,''' 탈이 안 날 수가 없었다. 결국 이 해 커리어 하이를 찍은 이후 혹사 여파가 제대로 나타나면서 2003년 이후 계속 내리막길을 걷고 만다. 그래도 2006년까지는 선발투수로 100이닝을 넘는 이닝을 소화해줬고 선발로 등판했을 때도 7~8이닝 정도 책임져주는 이닝 이터 기질도 있었다. 또 승운이 워낙 없어서 그렇지 5~8승 정도 챙겨주고, [[평균자책점]]도 4점대 정도로 웬만큼 버티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지만 투고타저였음에도 불구하고 높아져 가는 평균자책점과 나날이 줄어가는 이닝 소화력으로 인해 불안함을 점점 표출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부상을 얻었고 당시 감독이었던 [[이순철]]의 무리한 당겨쓰기로 인해 부상이 오히려 심화되고 만다.[* 여기서 [[이순철]]이 LG 감독 시절 남긴 희대의 명언인 '''재활은 마운드 위에서 하면 된다'''가 나오게 된다. 이 말은 흔히 [[이동현(1983)|이동현]]에게 한 걸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당시 재활이 필요했던 이승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어찌 보면 이승호도 이순철의 선수 관리 실패의 피해자였던 셈.] 마음을 다잡기 위해 1번에서 37번으로 번호를 바꾸기도 해봤지만[* 처음 LG 입단했을때의 등번호가 37번이었다.] 2008년 7월 이후로는 팔꿈치 부상으로 전력에서 제외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