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시품왕 (문단 편집) === [[고구려]]의 침공 === 하지만 외세의 침략은 끝나지 않았다. 신라 [[내물왕]] 시대인 400년 왜가 신라를 침공했는데 '왜가 신라성부터 (임나가라) 종발성까지 들어찼다'고 하여 통설에서는 가야, 그리고 신라와 대립하던 백제의 지원이 함께 했다고 본다. >十年庚子, 敎遣步騎五萬, 往救新羅. 從男居城, 至新羅城, 倭滿其中. 官軍方至, 倭賊退[_][* 이 부분은 7글자가 있었으나 모멸되었을 수도 있고, 원래부터 글자를 새기지 않았을 수도 있다.]▨▨背急追至任那加羅從拔城, 城卽歸服. 安羅人戌兵拔新羅城▨城倭寇大潰城▨[_][* 앞서와 같이, 16글자가 있었으나 모멸되었을 수도 있고, 16~17자에 해당하는 부분에 원래 글자가 없었을 수도 있다.]ㅁㅁ盡ㅁㅁㅁ安羅人戌兵新ㅁㅁㅁㅁ其ㅁㅁㅁㅁㅁㅁㅁ言 >10년 경자에 ([[광개토대왕|왕]]이) 보병과 기병 도합 5만 명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남거성을 거쳐 신라성에 이르니, 그곳에 왜군이 가득하였다. 관군이 막 도착하니 왜적이 퇴각하였다. (…) '''그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니 성이 곧 귀복하였다.''' '安羅人戌兵' …[* 이에 대한 해석도 분분하다. '[[안라국]]의 방위군',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신라인의 병사를 안치하여 …' 등으로 나뉘고 있다. [[광개토대왕#s-3.4.1|관련 문서]] 참조.] ㅁ 신라성 ㅁ성 ㅁㅁㅁㅁㅁㅁㅁ 하였고, 왜구가 크게 무너졌다. >---- >– 《[[광개토대왕릉비]]》 제2면 신라는 고구려 [[광개토대왕]]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이에 광개토대왕은 [[보병]]과 [[기병]] 5만명을 편성해 남하해 왔다. 다만 여기에는 판독 불가능한 글씨가 많아 [[논란]]이 있다. 이전까지는 임나가라(금관국)가 적극적으로 왜에 협조했다가 패배해 버리면서 이들이 가야 연맹의 [[맹주]] 자리를 내놓은 것으로 해석하였으나 고구려 군대가 몰려오자 임나가라 종발성이 즉시 '귀복(歸服)'하였다는 점과 5세기 초반에도 대성동 [[고분]]군의 위세가 유지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에 협조하여 크게 타격을 입지 않은 것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인해 금관국은 더 이상 신라의 압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실 369년 기록부터 백제가 [[일본]] 교역의 창구로 금관국이 아닌 탁순국 / 다사진을 택하고 4세기부터 [[부산]](독로국으로 추정) 지역에서 가야색과 신라색이 줄다리기를 하는 등 4세기 후반 신라는 점차 [[김해]] 쪽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광개토대왕 때의 원정이 직접 타격을 주지는 않았더라도 교역권이 5세기 초반이 되면 신라 주도로 완전히 넘어가는 상황에 영향을 일정 부분 미쳤으리라고 생각된다. 어찌되었건 금관국 [[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시기였고 결과적으로 안 좋은 방향으로의 전환점을 경험했던 왕.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