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연복 (문단 편집) === 소년기 === [[중화민국]]계 [[화교]] 집안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중국]] [[산둥성]] 무핑(牟平) 출신으로 이곳은 현재는 옌타이 시의 옆동네인 현급시로 사실상 옌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어머니도 [[산둥성]] 라이양(莱阳) 출신. 서류상 화교지만 자서전 <복 사부만 따라하면 집에서도 중화요리가 된다>에서 말하길 이연복 자신은 서울시 [[왕십리]]에서 태어났다고. 부모는 본토 중국 출신인데도 중화민국계(대만)가 된 이유는 대한민국을 비롯한 전세계 국가는 [[하나의 중국]] 법칙에 의해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중 하나만 인정해야 하는데 한국은 92년 전까지는 중화민국을 인정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공'이라고 부르면서 수교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내 화교들은 대부분 중화민국 국적을 부여 받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연복의 부모가 태어났던 시기는 본토에서 [[일본 제국|일제]]와 [[중일전쟁|싸우던]]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당 정부 시절]]이었기 때문에 중화민국 국적인 게 크게 이상할 것도 없었으며, 실제로 이런 이유로 '중화민국' 국적을 받아들인 화교도 많았다. 이연복 본인은 성인이 될 때까지 산둥에 가본 적도 없다고 밝혔다. 과거 대한민국은 자국민의 해외 여행을 엄격히 제한했으며 재한 화교라도 해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제한이 없어진 1980년대까지는 화교도 고향을 방문하기 힘들었다. 이후 한국 사람과 결혼하고 자신의 중식당도 자리 잡으면서 정식으로 대한민국으로 [[귀화]]했다. 어린 시절 부모님 중식당이 잘 안 돼 가세가 기울자, 사립인 화교 초등학교의 높은 학비를 견딜 수 없었다. [[http://www.huffingtonpost.kr/sehoi-park/story_b_7280670.html|어릴 적 짱깨라는 놀림도 자주 받았다고.]] 6학년 때 중퇴를 결심, 13살의 나이로 처음 [[철가방|배달가방]]을 들었다. 본인 증언에 따르면 당시엔 철가방이 없어 나무 가방으로 배달을 했다고 한다. 재질이 재질이라 매우 무거웠다고. 그리고 그 당시에는 랩을 감아주고 이런 게 없었기 때문에, 가다가 엎으면 욕은 욕대로 먹고 음식값만 물어줘야 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아버지 지인 가게에서 견습을 했으나, 직원들이 사장 똘마니라고 [[왕따]]를 시키자 다른 중식당에 취직한다. 17살에 [[명동]] 사보이 호텔 중식당 <호화대반점>의 막내로 들어간다. 일을 시작한 지 2년 만에 둘째 칼판에 오른다. 재료를 칼로 썰고 다듬는 담당이다. 대형 중식당 요리사는 재료를 익히는 불판, 면이나 빵 요리를 담당하는 면판 등으로 분업화되어 있다. 위 사진이 실린 기사에 따르면 저 당시에는 칼판이 가장 위세가 좋았다고 한다. 반면 오늘날에 제일 대우 받는 것은 불판. 현재 위에 중화요리 어벤저스에서 가장 유명한 불판장은 유방녕 셰프. 일손이 필요할 때면 자기 친구들도 호화대반점에 취직되도록 다리를 놔줬다. 그러다 어느 날 주방 파벌간 패싸움에 휘말리면서 그만뒀다. 평소 의리로 도와줬던 사람들이 반대로 내가 곤경에 처했을 때는 모르는 척 해 마음의 상처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방송이나 술이 좀 취하면 당시 얘기를 하는 듯하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는지 성격이 상당히 세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그래서 어릴 때 식당에서 외상 손님에게 밀린 돈을 받는 험한 일도 도맡아 했다고 한다. 이 날카로웠던 성격과 인상은 청년기 때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아내와 함께 중식당을 열었을 때부터 현재와 같이 성격과 인상이 유순해졌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