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영익 (문단 편집) === 안양 LG 치타스 === [[파일:71dec67c-4356-4a35-8dc6-77a3771a6443_png.jpg|width=450]] 고려대 졸업 후 1989년 [[FC 서울]]의 전신인 럭키금성 황소에 입단하였으며 비록 팀이 [[K리그]] 준우승에 머무르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데뷔 첫 해 인상적인 활약으로 럭키금성 수비진의 한 축을 이루었고, 데뷔 첫 해에 K리그 베스트 11에 수상하였다. 활약을 인정받아 국가대표에도 승선했지만 부상으로 월드컵 진출이 좌절되었고, 국가대표 대신에 지난 시즌 준우승의 한을 품기 위해 꾸준한 재활훈련을 거쳤던 덕분에 한 달만에 럭키금성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당시 럭키금성은 1990년 시즌을 앞두고 많은 축구 전문가들은 럭키금성의 위치를 하위권으로 분류했으나 그것은 예측일 뿐이었다. 90년 당시 럭키금성은 돌풍을 일으키며 1위 자리를 어느 팀에게도 허용하지 않았고, [[동대문운동장]]에서 2위였던 [[대우 로얄즈]]를 꺾고 통합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이영익은 K리그 챔피언의 자리에 오르는 영광을 안게 되었다. 팀명이 LG 치타스로 변경된 이후에도 여전한 활약을 보여주면서 승승장구 하나 싶었지만, 허리 부상이 그의 선수생활에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1991년 7월 전지훈련 도중 허리 부상으로 1년 동안 재활에 매진하여 1992년 9월에 소속 팀에 복귀하였고 1993년에도 변함없는 기량과 체력을 보여주었으나, 1994년 [[허리디스크]]의 악령이 재발한 바람에 1년 동안 재활훈련에 다시 매진해야 했다. 94년 [[조영증]] 감독이 부임한 이후 LG는 이미 세대교체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데다 부상으로 인해 기량은 예전만큼 나오지 못하게 되자 그가 설 자리는 점점 좁아져 갔다. 결국 1997년 5월 10일 [[전북 현대 모터스|전북 현대 다이노스]]와의 경기를 끝으로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은퇴를 선언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