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영훈(음악가) (문단 편집) == 여담 == * 본인을 음악으로 인도한 인생의 곡이나 아티스트에 대해서 그는 "소녀들 여성들 팬을 많이 확보했던 멜로디로만 제가 알려져 있지만 이문세씨를 통해서 못했던 게 뭐가 있냐면 센 소리에요. 조 카커(Joe Cocker)나 [[레이 찰스]](Ray Charles) 같은... 국내에선 고 김상국선배의 '불나비' 같은 곡은 정말 없다고 생각해요. '[[봄비(1967년 가요)|봄비]]'의 [[박인수(1947)|박인수]]선배도 좋아했죠. 또 하나의 텍스트는 [[비틀즈]]죠. (웃으며) 전혀 유사성이 없죠? 제 곡이랑. 그들 음악은 상당히 클래시컬해요. [[딥 퍼플]](Deep Purple)도 클래식적인데, 건반주자 [[존 로드]](John Lord)를 무지 좋아했습니다."라고 말했다.[[http://izm.co.kr/contentRead.asp?idx=2266&bigcateidx=11&subcateidx=13|#]] *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낸 곳은 [[우이동]].[[https://www.nocutnews.co.kr/news/197356|#]] * 2011년 대중음악 무크 '대중음악 사운드' 제3호(2011년 11월자)가 '한국 대중음악 명예의 전당에 추천하는 100인'중 한 분야인 '최고의 작곡가 10' 설문조사에서 이영훈은 [[신중현]], [[김수철(가수)|김수철]], [[김창훈]], [[박시춘]], [[윤상]], [[박춘석]], [[이봉조]], [[이정선(1950)|이정선]], [[유희열]]과 함께 언급됐다.[[http://ksoundlab.com/xe/soundfame/8104|#]] * 어린 시절에는 음악적 재능이 전혀 없었다고 한다. 인터뷰에서 그는 "어머니가 보시기에 형님과 누님이 너무 공부만 하니까 피아노도 가르칠 겸, 또 막내는 다른 쪽으로 시켜보고 싶으셨나봐요."라고 말했다. 또 "어렸을 때 기초적인 피아노 레슨을 받으면서 저도 모르게 작곡을 시작했어요. 바이엘이랑 체르니 연습하면서 이런 곡들과 비슷하게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쳐보니까 쉽게 되더라고요. 서너 곡정도 만들었어요. 어렸을 땐 악보 그리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대충대충 그렸는데, 지금 연주해도 최근에 쓴 곡만큼 짜임새가 있더라고요."라고 말하기도 했다.[[https://www.nocutnews.co.kr/news/197356|#]] * 노래 가사들의 언어 감각이 탁월하다며 책을 많이 읽었냐는 질문에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근데 읽다보니까 한계도 느끼고, 뭘 읽어야 할지도 모르겠더라고요. 책을 읽고 나면 머리도 맑아지고 성숙해지는 걸 느끼겠는데 도대체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몰랐어요. 그러다가 두꺼운 장편을 며칠에 걸쳐 읽고나면 "아, 이건 너무 무거웠다, 과중한 짐을 진 것 같다''는 생각도 하고. 그런 식으로 책을 많이 읽었어요."라고 답했다.[[https://www.nocutnews.co.kr/news/197356|#]] * 작사와 작곡 중 뭘 먼저 하냐는 질문에 "노래에 따라서 달라요. ''난 아직 모르잖아요'' 같은 경우 멜로디 한 줄 쓰고, 가사 한 줄 쓰면서 만들었어요"라고 말했다.[[https://www.nocutnews.co.kr/news/197356|#]] * 대학때는 [[그림]]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림을 전공했어요. 군대 제대 후 연극과 영화 음악에 관심이 있어서 좋은 작품들을 많이 봤어요. 당시엔 그런 쪽에 대해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기관이 없었어요. 음대에서 가르치는 고전음악은 이미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이었고요. 오케스트레이션 빼고 화성법이나 대위법은 이미 숙지가 되어있었거든요."라고 인터뷰에서 말했다.[[https://www.nocutnews.co.kr/news/197356|#]] * 독실한 개신교인이었다.[[https://www.youtube.com/watch?v=siZxJUmCgz0|#]] 대장암으로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도 “천국에 가서 좋은 음악 많이 쓰겠다”라고 말했다고 한다.[[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244114|#]] * 2009년 이영훈의 사망 1주기를 추모하는 노래비 제막식이 2월 14일 오후 서울 덕수궁 돌담길 정동교회 앞에서 열렸다. [[서울특별시]]가 허가하고 지원한 최초의 대중문화 노래비였다. 이날 행사에는 이문세가 참석해 노래를 불렀고 당시 시장인 [[오세훈]]도 참석했다. 노래비는 과거 아날로그 마이크 형태로 만들어졌다.[[https://m.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38779.html#cb#csidxa0f6321f1b02bb583909a11b5fdebcf|#]][[https://news.v.daum.net/v/20200330162756806?f=p|걸으며 만나는 동상 (정동길 옆 사진관)]] * 2018년 [[백석예술대학교]]에서 이영훈장학금을 설립했다.[[https://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55821|#]] * 2018년 10주기를 맞아 [[불후의 명곡|불후의 명곡 전설을 노래하다]]에서 그를 전설로 하는 특집을 방송했다. 또 10주기 기념 콘서트를 열었다.[[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409602|#]] * 2019년 11주기를 맞아 그에게 헌정하는 작은 음악회를 열었다.[[https://www.yna.co.kr/view/AKR20190124156000005|#]] * 2021년 [[전설의 무대 아카이브K]] 1화 한국형 발라드의 계보 특집에서 그를 '한국형 발라드의 원형을 만든' 인물로 평가하며 그가 작곡한 노래들을 후배 가수들이 메들리로 불렀다.[[https://www.youtube.com/watch?v=jW5Kzh_l22M|#]] * 이영훈이 기획했고 그가 작곡한 음악들로만 꾸며진 [[주크박스 뮤지컬]] '[[광화문 연가(뮤지컬)|광화문 연가]]'는 2011년 공연됐다. 2017년에는 새로운 버전으로 공연됐고 2021년 세번째 시즌으로 돌아오면서 꾸준히 공연중이다. 연출가 이지나는 "이영훈 작곡가님들의 80년대 히트곡이 세월이 지나면서 명곡이 되고, 다시 [[고전]]이 됐어요. '광화문연가'의 모든 곡은 히트곡으로 시작해 고전의 대열에 들어선 음악들"이라고 말하기도 했다.[[https://www.chosun.com/culture-life/performance-arts/2021/07/29/ATT2DG2VZZBX7HANXGHEYMHBIM/|#]] * 199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 그의 음악은 [[조성모]], [[이수영(가수)|이수영]], [[BIGBANG|빅뱅]], [[아이유]], [[오혁]] 등 세대를 초월해 많은 가수들에게 [[리메이크]]되고 있다. 2020년 음악예능 [[싱어게인 - 무명가수전]]에서는 그가 작곡한 [[이문세]]의 노래가 가장 많이 커버되기도 했다. >새천년을 전후해 아이돌 그룹이 대거 출현하고 힙합이 득세함에 따라 대중음악 주요 소비층의 연령대가 과거에 비해 낮아지기 시작했다. 이 경향으로 기존에 활동하던 발라드 가수들의 입지가 대폭 줄어들었다. 이문세 또한 영향을 받아 예전만큼 인기를 누리지 못했다. 이영훈과 다시 짝을 이뤄 제작한 12집, 13집에서는 '슬픈 사랑의 노래', '기억이란 사랑보다' 정도만 소소하게 전파됐다. 하지만 이 대전환기에서도 초기 히트곡들은 살아남았다. 아니, 어깨를 펴고 대중음악 시장을 활보했다. 리메이크 앨범의 붐 덕분이었다. 조성모가 부른 '깊은 밤을 날아서'를 필두로 이수영의 '광화문 연가', 성시경의 '소녀', 서영은의 '가을이 오면' 등으로 환생 퍼레이드가 벌어지면서 이영훈의 노래는 젊은 세대에게도 확산됐다. 이때 음반 제작자들, 가요 관계자들 사이에서는 "히트하고 싶으면 이영훈의 노래를 리메이크해야 한다."는 농담 섞인 조언이 돌기까지 했다. 최근에는 음악 경연 프로그램을 통해 이영훈의 작품이 새롭게 태어나는 모습을 수시로 접하게 된다. 일반인, 프로페셔널 가수 가리지 않고 많은 이가 그의 노래를 선곡한다. 작금의 현상은 원작이 높은 작품성과 강한 대중성을 보유했음을 재차 일러 준다.[[https://www.melon.com/musicstory/inform.htm?mstorySeq=6229&startIndex=0|#]] * 그가 남긴 사랑 노래의 대부분은 한 사람을 생각하며 만든 곡이라고 한다. 그가 유명세를 얻기 전, 20대 초반에 만났던 [[첫사랑]]이다. 그래서 그의 부인 김은옥씨는 남편의 노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은옥씨는 "나에 대한 노래가 아니라 옛사랑에 관계된 노래였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에는 좋아하게 됐다"며 "들으면 들을수록 가사가 참 좋더라. 서정적이고 내 가슴을 깊게 파고드는 것 같았다"라며 말했다.[[https://www.tvreport.co.kr/101845#rs|#]] * 이영훈은 그가 만든 많은 곡 가운데 가장 마음에 드는 곡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다시 만나리'를 가장 애착하고 있었던 곡이고, 그 다음에 '슬픈 사랑의 노래'나 '[[옛사랑]]', '[[광화문 연가]]' 이런 곡을 사랑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https://www.ytn.co.kr/_ln/0130_200612011715433274|#]] * 그의 노래에 왜 빠지지 않고 [[경복궁 광화문|광화문]]이 등장하냐는 질문에 "'[[광화문 연가]]'에 광화문 네거리라는 지명이 나오는데 나중에 알았지만 실제로는 없는 지명이었어요. 저는 이순신 장군이 서 있는 곳을 말한 건데(웃음). 사실 제 감성의 출발은 언제나 광화문과 [[덕수궁]]이죠. 워낙 궁을 좋아하니까(웃음). 유년기부터 광화문 주변을 자주 찾았고 그 시간에서 감성을 키웠어요."라고 답했다.[[https://m.nocutnews.co.kr/news/196084|#]] * 이영훈과 이문세 콤비의 최고의 [[명반]]은 보통 [[이문세 4집|4집]]과 [[이문세 5집|5집]]이 꼽힌다. 이 앨범들은 한국 대중음악의 기념비적인 명반 중 하나로 [[한국 대중음악 100대 명반]]에도 들어가 있다.[* 4집 13위, 5집 42위.] [[이문세 4집|3집]], [[이문세 4집|4집]]. [[이문세 5집|5집]]을 '명반 3부작'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 작사를 직접하는 이유로는 "처음엔 제 멜로디에 제가 가사를 붙이는 게 편해서 한 건데요. 나중엔 다른 작사가들에게 부탁을 해도 좀 어려워하면서 잘 안 써주더라고요."라고 말했다.[[https://m.nocutnews.co.kr/news/196084|#]] * 2006년 당시 음악저작권협회에서 가장 많은 저작권료를 받는 작곡가가 이영훈이었다. 그는 20년 동안 120곡 정도 발표했는데, 그 중 3,40곡이 히트를 한 덕분에 저작권료를 많이 받는 작곡가 중에 한 사람이 됐다고 한다.[[https://www.ytn.co.kr/_ln/0130_200612011715433274|#]] * 2007년 당시 한국음악계의 쓴소리를 하기도 했다. 이영훈은 대중음악의 계보가 끊기는 이유로, 젊은 음악인들이 어려운 일을 참고 견뎌내려는 근성이 없다는 것을 꼽았다. 그는 “연주자들은 이름을 얻기까지 오랜 시간 연습하고, 선배들에게 인정받아야 되는데, 이 기간을 참지 못한다. 그게 요즘 세태다. 작곡가들도 스스로 연구하고 개발하려 하지 않는다. 연주든 작곡이든 오랜 기간 연습해 자기만의 작품세계를 구축해야 되는데, 거기까지 힘든 시간을 참지 못한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또 그는 국내 대중음악계에 표절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도 같은 이유라며 개탄했다. 이영훈은 작곡가들이 스스로 만족할 만한 작품이 나올 때까지 참지 못하고 쉽게 돈을 벌려고 하다보니 표절논란이 불거지게 된다고 했다. “작곡가가 돈을 많이 버는 것은 좋아요. 그러나 돈을 벌기까지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하죠. 자기 세계를 만드는 기간을 거쳐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자기세계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는데, 곡을 팔기 위해서만 노력해요. 그러다 결국 남의 세계를 몰래 가져오게 되죠.” 또한 작곡가들이 대중에 조금 인정받은 자기작품을 표절하는 것에 대해서도 경계를 나타냈다. “대중에 좀 인정받았던 자기 곡을 표절하는 경우도 많아요. 도자기 만들어놓고 조금이라도 흠이 발견되면 깨버리는 도공들처럼, 작곡가들도 곡을 쓰다가 다른 곡과 비슷하다거나 내 것이 아니다 싶으면 곧바로 폐기해야 합니다. 작곡가들은 기본적으로 끊임없이 습작을 많이 써봐야 해요.”[[https://star.mt.co.kr/stview.php?no=2007043008444976598|#]] * 2016년 서울고등법원의 판결에 의해 이영훈의 유족들이 [[저작인접권]](음반 제작자의 권리)을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서울고등법원 제5민사부(유영선 판사)는 이영훈 작곡가의 아내와 아들이 지난 2014년 음반 기획사 뮤직마운틴과 유통사 [[유니버설 뮤직]] 등을 상대로 제기한 ‘저작권침해 정지 등의 소송’에서 이 같이 조정했다고 밝혔다. 성립된 조정 결정에 따르면 그간 문제가 된 음반의 저작인접권은 이영훈 작곡가의 유족에게 최종 귀속됐다.[[http://m.sports.khan.co.kr/view.html?artid=201609130800003&code=540301|#]] * 이영훈의 음악들의 저작권은 그의 가족들이 설립한 회사인 '영훈뮤직'에서 관리하고 있다. 영훈뮤직은 이영훈 작곡가의 음악 저작권을 관리하는 법인 회사다. 하는 일들은 뮤지컬 '[[광화문 연가(뮤지컬)|광화문 연가]]'를 비롯해 이영훈의 저작물 관리 및 저작물로 만들어지는 콘텐츠 기획, 제작, 관리까지 총괄하고 있다고 한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jenmmusical&logNo=221437946244|#]] * 이문세의 노래외에도 가수 [[이광조]]의 ‘[[https://youtu.be/h4ReH3QjEJc|세월가면]]’을 비롯해 [[https://youtu.be/dq4wSZq8_AU|이은저]], [[유열(가수)|유열]], 박소연 등의 음반이나 노래들도 만들었다. 걸그룹 [[쥬얼리]]의 2집의 수록곡 '[[https://youtu.be/I28HjlNMhv4|How Are You?]]'를 작곡하기도 했다.[* 이영훈의 곡을 받은 유일한 아이돌이다. 사족이지만 이영훈의 팬들 사이에서는 이 곡이 기존 이영훈의 스타일과 매우 달라서 호불호가 많이 갈린다고.] 또 영화 ‘개 같은 날의 오후’, ‘[[인샬라]]’, 드라마 ‘[[까레이스키]]’ ‘[[사랑을 기억하세요?]]' ‘[[산(드라마)|산]]’ 등의 OST도 완성했다. 그가 담당한 영화 음악 중 가장 유명한것은 2003년 개봉한 영화 '[[보리울의 여름]]'의 사운드트랙이다.[[https://youtu.be/7nhMM8zGPoM|#]] 이 영화의 나온 [[https://youtu.be/3Ygqs75NGew|테마곡]]은 [[개그콘서트]]의 코너 [[봉숭아 학당]]의 오프닝곡으로 유명하다. * [[2002 부산 아시안게임]]의 공식 주제가 <아시아의 꿈(Dream of Asia)> 를 작곡하기도 했다. * 2007년 4월 언론 [[한겨레]]와의 인터뷰.[[https://m.hani.co.kr/arti/culture/music/206076.html|기사]] || {{{#!wiki style="margin: -5px -10px" [youtube(ByVkSJ25kwc)]}}} || * [[김현식]]에게도 곡을 줄뻔했다. 2006년 이영훈은 인터뷰에서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이고, 아주 절창이었죠. 그 시대에는 몇 분 안계시는 가창력이 뛰어난 분이셨는데, 그 당시에 작곡가분들이 많지가 않았었어요. 장르가 급변할 수도 있는거기 때문에.. 제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서 작곡을 하던 중에, 10곡을 드리고 싶었는데 그걸 완성을 다 못하고 먼저 가셔서 아직도 가슴에 여운이 남아있습니다."라고 말했다.[[https://www.ytn.co.kr/_ln/0130_200612011715433274|#]] * 작사가 [[김이나]]는 가장 좋아하는 가사로 이영훈이 쓴 [[옛사랑]]을 꼽았다.[[https://m.youtube.com/watch?v=9-QkmAgGl8o|#]] * 배우 [[이병헌]]이 이영훈의 팬이다. 이병헌은 이영훈 추모 10주기 콘서트의 깜짝 출연해 이영훈의 노래 '기억이란 사랑보다'를 불렀다. 이영훈의 팬이어서 선뜻 섭외에 응했고 한 달간 노래 연습을 했다고 한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8/02/28/2018022802641.html|#]] * 그가 작사/작곡한 [[붉은 노을]]은 음악 교과서[* 태성출판사의 음악교과서에 '대중음악의 세계로'라는 소단원에 실렸다.]에도 실렸다.[[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2/12/2016021201883.html|#]] * 이영훈의 아들이 찾은 그의 미발표곡만 200곡이 넘는다고 한다. 400곡 정도 모티브를 적어 놓은 게 있다고 하며 그의 일기에 써놓았다고 한다. 그 곡들을 다 찾지 못했으며, 모티브만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고 가사 없이 멜로디만 써놓은것도 있고 가사만 따로 적어 놓은것이 있다고 한다. 언젠가 들어볼수 있냐는 질문에는 "작곡가의 의도와 스타일, 순수성에 공감해주는 아티스트가 있다면 언젠가는… 그런데 이제 본인이 안계시니까 어렵죠. 누군가 결정을 해서 세상에 선보여야 하는데 본인 아닌 다른 누군가가 하기엔 조심스럽고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거의 완성돼서 발표하려다가 미뤘던 곡들이 조금 있어요. 그런 것들 위주로만 약간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https://www.urigayo.kr/k/%EC%9D%B4%EC%A0%95%ED%99%98_%EC%9D%B8%ED%84%B0%EB%B7%B0|#]] * 작곡가 [[윤일상]]과 [[조영수]]가 존경하는 작곡가이기도 하다.[[http://ch.yes24.com/Article/View/17274|#]][[https://biz.chosun.com/site/data/html_dir/2020/03/28/2020032800165.html|#]] * 상술했듯 하루에 커피 40잔을 마시고, 담배 네 갑을 피우며 노래를 만든것으로 유명한데 아들 이정환[* 뉴욕에서 대학과 대학원을 나왔다고 한다. 코딩, UI/UX 등을 다루는 IT 전공을 했고, 부전공으로는 광고를 공부했고 졸업하고 광고회사에서 경험을 많이 쌓았고, 뉴욕에서 웨어러블 테크(wearable tech) 스타트업을 세우고 운영중이라고 한다.[[https://m.blog.naver.com/PostView.naver?isHttpsRedirect=true&blogId=cjenmmusical&logNo=221437946244|#]]]은 그 일화에 대해 "아버지 방에 들어가면 늘 담배 연기가 자욱했어요. 재떨이에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 있고요. 진짜로 커피 40잔을 마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많이 마시긴 하셨죠. 그리고 작곡할 땐 지우개가 달린 주황색 연필을 쓰셨어요. 그 때문에 피아노 건반 위에는 늘 지우개 가루가 흩어져 있곤 했었죠."라고 말했다.[[https://www.hani.co.kr/arti/PRINT/833349.html|#]] * 사망 1주기인 2009년 이영훈의 삶과 음악을 북아트 작품으로 출판했다. 모두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으로, 한 권은 이영훈의 가사들을, 한 권은 그가 홈페이지에 남긴 글과 덧글들을 함께 엮었다. 본문 한 장 한 장 원형 커터로 잘라 접지하여 LP판 디자인으로 만든 책이었다. 이 책은 이영훈의 글과 아내 김은옥의 글을 함께 엮은 <삶> 그리고 작곡 노트와 함께 편집한 가사집 <음악>, 이렇게 두 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권 중 한 권인 <삶>은 1989년부터 2008년 초까지 작곡가 이영훈이 남긴 기록들을 모았다. 음악 노트뿐 아니라 일기, 메모 등에서 발췌한 글에는 그의 삶의 구체적인 흔적들이 남아 있다. 나머지 한 권인 <음악>은 1985년부터 그가 쓴 가사들을 모아 발표순으로 정리했고, 그가 쓴 ‘작곡 노트’를 함께 편집하여 그의 노래들을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했다. “이 곡은 <옛사랑>과 더불어 내 음악 세계의 두 기둥이 되는 곡 중 하나다.”(<광화문 연가>의 작곡 노트, p. 58)라는 글이나 “이 곡 이후에 쓴 내 노래의 가사들은 모두가 별첨 정도일 뿐이다.”(<옛사랑>의 작곡 노트, p. 100) 등의 작곡 노트에는 곡을 쓸 당시의 심경이 잘 드러나 있다[[https://www.aladin.co.kr/m/mproduct.aspx?ItemId=3247624|#]] * 그의 악보에는 '모든 이의 가슴에 숨어 있는,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되찾게 하는 음악을 만들게 하소서.'라는 기도문처럼 남겨 놓은 글이 있다고 한다. 본인의 음악으로 하여금 사람들의 가슴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정서들을 일깨울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그런 기도문이라고 한다.[[https://www.urigayo.kr/k/%EC%9D%B4%EC%A0%95%ED%99%98_%EC%9D%B8%ED%84%B0%EB%B7%B0|#]] 또한 그의 아들에게 예술품이라면 모름지기 아름다워야하고 음악은 듣는 이에게 좋은 영향을 끼쳐야 한다고 항상 강조했다고 한다.[[https://www.mk.co.kr/news/culture/view/2018/02/117655/|#]]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