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영훈(음악가) (문단 편집) === 작곡가로서 === >악상은 영화적으로 잡아요. 뭔 곡을 써야 되겠다 싶으면 피아노 앞에 앉아서 담배 피우고 커피 마시면서 명상을 하죠. 어느 장면을 생각할까, 젊었을 때 대학로나 시청 앞에 섰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 버스를 타고 이런 구체적인 장면을 생각하면 그 배경음악이 떠올라요. 그럼 그걸 바로 쓰는 거죠.[* '작곡가 이영훈 1주기' 중에서, [[임진모]] 글.] >이영훈의 음악을 내게 감히 정리하라고 한다면 다름 아닌 바로 그렇게 정리하고 싶다. 그의 음악은 실로 만든 이와 듣는 이가 같이한 음악이라고, 그래서 존귀한 음악이라고. 1980년대 중반 이문세의 목소리로 전해진 이영훈의 곡은 얼핏 혁명적 경이로 다가왔다. 당시 청취관행으로 볼 때, 그의 음악이 대중과 쉬 동화되기는 어려운 성질의 것이었다. 그의 멜로디 패턴은 이전까지 음악계를 지배해온 트로트적(음악계에선 이를 '뽕'이라고 한다) 접근에서 크게 벗어나 있었다. 클래식의 영향이 느껴지는 고급스럽고 세련된 그러면서도 예쁜 코드워크와 선율로 발라드의 새 장을 연 것이다. > >기존 문화와의 충돌이 예상되었지만 그의 음악은 정반대로 대중들에게 가뭄 속의 단비처럼 환호되고 빠른 속도로 수용되었다. 특히 그들 감수성에 부합한 가요가 없어서 허전하던 20대와 30대 여성들에게는 축복 그 자체였다. 당대의 음악시장이 판매량 100만장 신화에 도전할 정도로 몸집을 불리게 된 것은 아마도 예나 지금이나 대중문화소비의 가장 큰 고객인 이 20대와 30대 여성이 (처음으로) 대거 음악시장에 참여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영훈선생의 역사적 스탠스가 거대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980년대에 새로운 발라드 스타일의 창조로 가요계 전성기를 일궈낸 것은 '이문세 노래'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한 '이영훈 곡'의 각별한 위업이다.''' >---- >― [[임진모]], 〈[[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20016|작곡가 이영훈 1주기]]〉 >그 이전의 발라드가 [[트로트]]적인 과장된 창법과 [[신파]]조의 멜로디로 이어져왔다면, 이영훈의 발라드는 팝 팬의 취향까지 자극할 수 있는 세련된 애수의 노래였다. '''그래서 이영훈은 한국 발라드의 [[모더니즘]]을 확립한 작곡가였다.''' >---- >― 김작가,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82|이영훈이 갔습니다, 팝 발라드가 웁니다]]〉, [[시사IN]] 이영훈은 인터뷰에서 자신의 음악적 기초는 [[바흐]], [[쇼팽]], [[베토벤]], [[라흐마니노프]]의 느낌에 있다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러한 클래식을 가요에 대입한 것이 아니라 창의적 방식으로 그만의 '팝 발라드’ 스타일을 주조해낸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의 음악은 클래식에 우리 정서를 섞고 휘젓고 새롭게 빚어낸, 일종의 ‘퓨전’이다. 이를 통해 한국 고유의 팝 발라드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이영훈 음악은 크게 셋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회고적이나 당대의 감성을 아우르는 서정적인 곡, 감정 극대화에 의한 슬픈 감성의 곡, 그리고 상대적으로 빠른 리듬에 살짝 격정을 머금은 곡. 대표적인 서정적인 곡은 ‘[[광화문 연가]]’와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시절 이문세 노래를 접한 지금의 기성세대가 가장 추억에 매몰되는 노래들이다. 두 번째 애조와 비감(悲感)은 그야말로 이영훈의 특장 정서인데, 여기선 ‘[[소녀(이문세)|소녀]]’, ‘슬픈 사랑의 노래’가 해당될 것이다.[* 이영훈은 세상을 떠나기 9개월 전 인터뷰에서 자신의 대표곡으로 ‘슬픈 사랑의 노래’를 꼽았다. 1987년 모티브를 잡았으나 늦게 가사를 완성해서 1999년 이문세 12집에서 이소라와의 듀엣 곡으로 수록했다.] 세 번째 스타일인 ‘[[깊은 밤을 날아서]]’와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붉은 노을]]’과 같은 속도감 있는 리듬 터치를 들으면 이게 과연 같은 작곡자의 곡인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렇듯 이영훈의 눈부신 업적은 우리만의 팝 발라드를 굴착해낸 것과 더불어 상기한 것처럼 음악의 다양성을 구현했다는 데 있다. 이영훈의 작법에 대해 한국인 특유의 이른바 '뽕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비판도 있으나, 오히려 [[클래식(음악)|클래식]]적인 작법을 [[대중음악]]에 훌륭하게 접목시킨 데다가 당대에도 히트할 정도로 시대 흐름에 앞서가는 곡을 써 낸 훌륭한 [[작곡가]]라고 평가하는 것이 정당하다. '뽕끼'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이라고 명확하게 정의하기는 어려우나 이영훈의 음악이, 특히 초기에 그런 멜로디적 특성을 가졌다는 점에는 많은 공감이 있다.[* 이영훈과 [[유재하]]가 고평가되는 이유가 사실 여기에 있다. [[임진모]]가 남긴 글처럼, 이영훈 이전에는 [[대중음악|팝]]이 고퀄리티의 음악인 데 비해서 가요는 기껏해야 [[트로트]]적인(이것이 속칭 '뽕끼'다.) 감성에 호소하지 않으면 안되는 2류 음악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그런 인식구조를 뒤집어 엎은 것이 이영훈이고, [[임진모]]가 그런 이영훈을 일종의 혁명가로 평가하는 것도 그런 데서 비롯된 것이다. [[유재하]]나 이영훈은 모두 기존의 가요 작법도, [[조영남]]처럼 스탠다드 팝을 번안하거나 팝의 흐름에 따라가는 작법도 아닌 독창적인 형태의 음악을 시도했다. [[유재하]]의 음악을 이영훈보다 높게 평가하는 쪽에서는 [[유재하]]의 음악이야말로 순수하게 기존 한국 가요의 반복 구조를 탈피했다는 점에서 그런 평가를 내리고, 이영훈을 더 높게 평가하는 쪽에서는 서양음악적 구조를 [[대중음악]]에 천재적으로 녹여낸 유재하에 비해 기존 가요와 [[클래식(음악)|클래식]] 모두에서 장점을 고루 취한 이영훈의 특징에 높은 평가를 내린다.] 그렇지만 그가 스스로 대표곡으로 삼는 '슬픈 사랑의 노래'에 이르면 그런 점도 많이 희석되고 순수한 이영훈의 색깔이 더 잘 드러나게 된다. 여기에는 [[유재하]]의 영향도 컸으리라 짐작되지만 [[유재하]]의 음악이 시대를 앞서간 음악이었다는 점을 가지고 이영훈의 트렌디함을 평가 절하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당대의 맥락으로는 이영훈의 작법이 예술성과 대중성 모두에 호소력이 짙은 방법론이었음을 평론이나 음반 판매량 모두가 입증해 주고 있다. 말년에 그가 밝힌 바로 그의 음악적 지향점은 [[클래식(음악)|클래식]]과 [[대중음악]] 사이의 빈 자리를 메우는 음악이었다고 한다. [[이문세]]가 밝혔듯 이영훈의 음악은 [[보컬]]이 빠지고 [[오케스트라]]만 들어오면 그대로 [[클래식(음악)|클래식]]이며, [[이문세]]라는 [[보컬]]의 독보적인 음색과 기교를 빼고 부르는 창법이 더해지면서 [[대중음악]]의 영역까지 넓어지는 음악이라는 점에서 이영훈은 자신의 의도한 바의 음악을 해 낸 것이다. >Q. 음악작업 하실 때의 모습을 기억하시는지요. > >아들 이정환: 제가 기억하기로는 흰 벽 앞에 업라이트 피아노를 놓으시고 흰 벽을 바라보면서 작곡을 하셨어요. 어떤 장면을 떠올리고 모티브를 잡으신 후에 전개, 구성 같은 것들을 작업하신다고 하셨어요. 작업할 때는 주로 지우개가 달린 연필을 예쁘게 깎아 놓고 악보를 고치면서 다듬어 나가셨어요. 평소에 모티브는 정말 빨리 나오는데 비해 곡을 완성하기까지는 굉장히 오래 걸리셨어요. 한 곡, 한 곡 심혈을 기울여서 만드셨거든요. 지우고 또 쓰고. 후렴구에 바리에이션(variation)도 많고요. 1년에 한 열다섯 곡 정도를 완성하셨던 걸로 기억하고 있어요. 작곡가라는 타이틀을 굉장히 신성하게 생각을 하셨던 분이라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으시려고 노력하셨던 것 같아요. 20대 때는 혜화동 로터리 아카데미극장 2층에 작업실을 두고 하셨어요. 주로 조용한 새벽에 편한 마음으로 작곡을 하다가 해가 뜨면 가로수 무성한 동숭로를 거닐면서 영감을 받았다 하시더라고요. 그리고 결혼하신 후에는 아파트에 사니까 전자 피아노를 사셔서 주로 밤에 헤드폰 끼고 조용히 작업을 하셨어요. 제가 기억하기로는 작업하실 때는 주변에 사람이 없어야 돼요. 그리고 밤늦은 새벽에 도둑질 하듯 곡을 쓰셨던 분이에요. > >Q. 어디서 음악적 영감을 받으셨을까요. > >아들 이정환: 아버지는 음악을 잘 듣지 않으셨어요. 대신 소리에 민감하셨던 분이고 오감에 민감하셨던 분이죠. 창 밖 많이 내다보시고 바람 소리를 비롯해서 자연에 많이 집중하고 영감을 받았던 분이에요. 가사를 들어보면 아시겠지만 서울 하늘을 정말 좋아하셨고 떨어지는 낙엽, 바람 소리, 새벽의 그 고요함 같은 것들에 되게 집중하셨어요. 거기서 지난 추억이나 기억 같은 것을 그런 걸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면서 멜로디도 떠올리고 그러셨던 것 같아요. 평소에 일기를 쓰셨어요. 그림도 많이 그리시고. 어머니한테 사랑 고백하는 편지 많이 쓰셨죠. 곡을 완성하면 보컬 트레이닝, 믹싱, 마스터링을 해야 하니까 녹음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거든요. 그래서 녹음실 갔다 늦게 들어오는 게 미안하셨는지 그렇게 고백 같은 메모를 적어 놓고 나가셨었어요. 어렸지만 훈훈했죠. 가정적이고 따뜻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https://www.urigayo.kr/k/%EC%9D%B4%EC%A0%95%ED%99%98_%EC%9D%B8%ED%84%B0%EB%B7%B0|#]]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