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와테현 (문단 편집) == 역사 == 도호쿠의 동북부에 위치한 지역이라 일본 문화권 편입이 다소 늦었는데, [[헤이안 시대]] 초기인 8세기 말 혹은 9세기 초에 가서야 이와테 남부가 중앙조정의 영향권에 들어왔고 이와테 중북부는 아키타 북부, 아오모리 전역과 함께 헤이안 시대 후기인 11세기 중후반에 완전히 일본 조정에 편입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에미시]]의 영역으로, [[아테루이]]가 활동했던 지역이다. 야마토 편입 이후에는 지금의 [[후쿠시마현]], [[미야기현]], [[아오모리현]]과 더불어 [[무츠#s-1|무츠노쿠니(陸奥国)]]로 불렸다. 11세기 말부터 12세기 후반까지는 [[오슈 후지와라]]씨(奥州藤原氏)가 [[히라이즈미초|히라이즈미]]에 거점을 잡고 조정에 대항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여 한 세기 가까이 번영을 누렸으나, 결국 [[가마쿠라 막부]]의 초대 쇼군이 되는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멸망했고 고도(古都) 히라이즈미는 초토화되었다. 이후 [[가마쿠라 시대]]에는 북쪽에는 난부씨(南部氏), [[시바(아시카가)|시바씨]], 아소누마씨(阿曽沼氏), 남쪽에는 카사이씨(葛西氏), 루스씨(留守氏) 등이 곳곳에서 독립 파벌로 성장했으나 서서히 [[후쿠시마현|후쿠시마]]에서 북상한 다테씨(伊達氏)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전국시대(일본)|전국시대]]에 들어서는 카사이씨와 루스씨는 다테씨에 종속되었다. [[에도 시대]]를 전후하여 남부는 다테씨의 센다이번(仙台藩)[* 후의 다테번(伊達藩)], 다무라씨(田村氏)의 이치노세키번(一関藩), 루스씨(留守氏)의 미즈사와(水沢)로 나뉘었으며, 북부는 난부씨의 모리오카번(盛岡藩)[* 후의 난부번(南部藩)]이 설치되었다. [[보신 전쟁]] 중인 1868년에는 오우에쓰열번동맹(奥羽越列藩同盟)이 다테번과 난부번을 중심으로 결성되었으나 넉 달 만에 신정부군에 항복했다. 모리오카번은 결국 재정난으로 [[폐번치현]]이 이루어지기 전인 1870년에 폐번을 신청하고, 이후 '''모리오카현(盛岡県)'''이 설치되었다. 1년 후에는 '''이와테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876년에는 현의회가 개회했다. 1889년에는 시제(市制)가 시행되어 [[모리오카시]], 1937년에는 카마이시시, 1941년에는 [[미야코시]]가 설치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말, 1945년 7월 14일에는 이 지역의 카마이시 제철소가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사우스다코타에 의해 포격을 받았는데 이는 '''미국 전함으로서는 최초의 일본 본토 포격'''으로 기록되었다. 패전 이후에는 교통편도 나쁘고 소득도 낮으며 산업 진흥도 미진해서 자조적으로 '일본의 티벳'으로 부르던 적도 있었다. 이는 1964년에 [[하나마키 공항]]이 문을 열고 1982년에 [[도호쿠 신칸센]]이 개통되면서 개선되었다. 2008년에는 [[이와테 미야기 내륙 지진]]으로 약 450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냈으며, 2011년에는 [[도호쿠 지방 태평양 해역 지진]]이 발생하여 현의 모든 해안에 [[쓰나미]]가 밀려와 막대한 인명 및 재산피해를 냈다. 아직도 피해는 복구중이며, 현 차원에서 [[산리쿠|산리쿠(三陸)]] 지역 부흥 프로젝트와 홍보를 추진한다. 2020년 7월 29일까지 [[코로나19]]가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하는 시점에서도 일본 내에서 유일하게 확진자가 없는 지역으로 주목 받았으나 코로나 검사 회피 따위 의혹을 받던 중 7월 29일 부로 확진자가 발생하면서 청정 지역 타이틀은 결국 깨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