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완용 (문단 편집) == 여담 == [[파일:낙서.jpg]] * [[일제강점기]] 때 [[화장실]]의 [[낙서]]에는 이완용 욕이 빠지지 않고 등장했다고 한다. [[http://gall.dcinside.com/board/view/?id=starcraft_new&no=4461412&page=1|당시 화장실 낙서들]]. 이완용의 식당/요리옥/요리점이라는 낙서가 꽤 많이 보이는데, [[똥이나 처먹어 이 새끼들아|변소가 이완용의 식당이라는 의미인 듯 하다.]][* 출처: 변은진. (2011). 일제 전시파시즘기(1937~45) 조선민중의 '불온낙서' 연구. Han'guk Munhwa (Seoul, Korea), (55), 309-344.] * [[순종(대한제국)|순종]] 때인 1908년, 이완용은 조선시대에 간신으로 취급받은 사람들의 복권을 건의하여 받아들여졌다. 그 중에는 [[윤원형]] 같은 진짜배기 간신도 있지만 붕당정쟁에 휘말려 역적 취급된 소론, 남인, 북인계 인사들도 있었고,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여기에 '''고종을 시해하려 한''' 사람들, [[세조(조선)|세조]] 때의 이징옥, [[광해군]] 때 [[북인]](대북)의 영수로 [[인조반정]] 때 처형된 [[정인홍]] 등도 있었다. 상당수가 현대에 재평가되고 있는 인물. 순종의 즉위 기념 대사면령의 일환인데, 고종 친정 직후부터 명예회복 운동이 불었으나 [[최익현]] 등이 결사 반대했었다. 이후에도 이완용은 [[박지원(실학자)|박지원]], [[정약용]], [[남이]] 등 그동안 신원받지 못했거나 재야의 명성에 비해 공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인사들을 신원하고 시호를 수여하는 작업을 행했다. 이완용의 이러한 복권 사업은 그가 매국노라서 그동안의 간신들을 복권시키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어차피 나라가 망해가니 명목상의 신원이나 해주자는 정리 작업에 가깝다. 일부 [[노론 음모론]]자들은 이완용이 친일 노론의 수괴라서 조선에 해악을 끼친 간신들을 복원시켰다고 우기기도 하는데 간신, 역적으로 낙인찍힌 것 말고는 아래 명단에 공통점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정작 그 노론에게 당했던 소론, 남인계 등의 인사들도 적지 않다. 아래는 그 명단과 당파 및 기타 설명. >- 좌의정(左議政) 서흥 부원군(西興府院君) 한효순(韓孝純, 대북) >- 영의정(領議政) [[정인홍]](鄭仁弘, 대북) >- 좌의정 목내선(睦來善, 탁남) >- 이조 판서(吏曹判書) 문경공(文敬公) [[이현일(조선)|이현일]](李玄逸, 영남 남인) >- 영의정 문충공(文忠公) [[이광좌]](李光佐, 소론) >- 영의정 문정공(文貞公) [[조태구]](趙泰耉, 소론) >- 좌의정 문충공(文忠公) 조태억(趙泰億, 소론) >- 좌의정 충간공(忠簡公) 최석항(崔錫恒, 소론) >- 좌의정 충정공(忠靖公) [[유봉휘]](柳鳳輝, 소론) >- 대사헌(大司憲) [[김일경]](金一鏡, 소론 준론) >- 병조 참판(兵曹參判) 김중기(金重器) >- 회인 현감(懷仁縣監) 김도응(金道應) >- 예조 참판(禮曹參判) 정후겸(鄭厚謙, [[영조]] 때의 외척) >- 이조 참판(吏曹參判) 김하재(金夏材, [[정조(조선)|정조]]를 모독한 노론) >- 좌승지(左承旨) 안기영(安驥泳) >- 우부승지(右副承旨) 권정호(權鼎鎬) >- 부호군(副護軍) 조중호(趙中鎬) >-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익순(金益淳, [[김삿갓]]의 할아버지) >- 홍문관 시독(弘文館侍讀) 이희화(李喜和) >- 우의정(右議政) [[민암]](閔黯, 남인) >- 형조 판서(刑曹判書) 이의징(李義徵) >- 대사헌(大司憲) 한세량(韓世良) >- 승지(承旨) 신치운(申致雲) >- 절도사(節度使) [[이징옥]](李澄玉, [[계유정난]]에 반대한 장군) >- [[사옹원]] 판관(司饔院判官) 원용성(元用星) >- 감역(監役) 허욱(許煜) >- 군부 협판(軍部協辦) 이주회(李周會) >- 이조 참판 이진유(李眞儒) >- 승지 정해(鄭楷) >- 예조 참의(禮曹參議) 서종하(徐宗廈) >- 이조 참의(吏曹參議) 윤성시(尹聖時) >- 대사헌 [[박필몽]](朴弼夢,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준론) >- 대사간(大司諫) 이명의(李明誼, 소론 준론) >- 형조 판서 이사상(李師尙) >- 이조 참의 윤연(尹㝚) >- 훈련 대장(訓練大將) 윤취상(尹就商, 소론 준론) >- 부제학(副提學) 이명언(李明彦) >- 보덕(輔德) 김중희(金重熙) >- 함경 감사(咸鏡監司) 권익관(權益寬) >- 교리(校理) 윤상백(尹尙白) >- 지평(持平) 윤지(尹志, 나주 괘서사건의 주모자로 소론) >- 목사(牧使) 이하징(李夏徵, 소론 준론) >- 동부승지(同副承旨) 유수원(柳壽垣) >- 대사헌 심악(沈䥃) >- 판윤(判尹) 박찬신(朴讚新) >- 포도 대장(捕盜大將) 조동정(趙東鼎) >- 교리(校理) 이거원(李巨源) >- 정언(正言) 이명조(李明祚) >- 경무사(警務使) 권형진(權瀅鎭) >- 이조 판서 [[윤휴]](尹鑴, 청남) >- 영의정 [[윤원형]](尹元衡) >- 지평 이동양(李東讓) >- 정언(正言) 이범제(李範濟) >- 현감(縣監) 이공윤(李公胤) >- 승지 이중술(李重述) >- 진사(進士) 이하택(李夏宅) >- 승지 이보욱(李普昱) >- 승지 김호(金浩) >- 현감 박필현(朴弼顯, 소론 준론) >- 병사(兵使) 박태신(朴泰新) >- 감역(監役) 정권(鄭權) >- 부수(副率) 조현빈(趙顯彬) >- 부사(府使) 심유현(沈維賢) >- 감사(監司) 권첨(權詹,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노론) >-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사로(李師魯) >- '''[[밀풍군]]'''(密豊君) 이탄(李垣) >- 승지 이재화(李在華) >- 정언 이우화(李宇和) >- 주서(注書) 권숭(權崇) >- 이조 참판 김정관(金正觀) >- 동부승지 김정리(金正履) >- 감사 정사효(鄭思孝, 이인좌의 난에 가담한 소론) >- 정언 권집(權䌖) >- 부사(府使) 김주태(金柱泰) >- 통제사(統制使) 김윤(金潤) >- 좌부승지(左副承旨) 채동술(蔡東述) >- 좌의정 박홍구(朴弘耉) >- 승지 박홍도(朴弘道) * [[성균관대학교]] 홈페이지에 역대 총장 명단[* 정확히 말하면 성균관 대사성.]에 이완용이 포함되어 있다. [[https://www.skku.ac.kr/skku/about/s620/sub07_01.do|컨트롤 + f키를 이용하여 직접 찾아보자.]] 참고로, 같은 을사오적인 [[박제순]]도 있다. 덕분에 성균관대는 "친일파가 총장한 학교"라고 놀림받는다. 단, 이 당시의 '대사성'의 실질적인 위치에 대해서는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대사성이 당대 성균관을 총괄하던 직책인 것은 맞지만 실질적으로 현재의 총장과 비슷한 급의 인물이었다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조선 초기에는 실제로 대사성이 권위를 가진 직책이었으나, 이후 성균관은 고위급 진출에 그다지 유리하지 못한 [[한직|뻘코스]] 취급을 받고 그에 따라 대사성의 지위도 급격히 추락했다. 고종 때 와서는 어느 정도 실력만 되면 관례적으로 붙여 주는 직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당하다. 실제 저 페이지에 들어가보면 고종 재위 기간인 15,886일 동안 대사성이 무려 344명이었다. 1인당 평균 46.18일(1달 반 정도) 재직한 셈. 또한 조선은 직책 수는 많고 관료 수는 적었기 때문에 한 관료가 수많은 직책을 맡는 일이 허다했다. * 이완용과의 관계를 '''오해받는 사례들'''로는, 같은 집안인 것뿐인 역사학자 [[이병도]][* 다만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사편수회에서 근무한 행적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어있다.] 는 물론이고, 이완용의 고향이 아닌데 고향으로 잘못 알려진 [[전라도]][* 이는 최근 인터넷 상에서 악질적으로 창궐하는 전라도 관련 [[지역드립]]에 이용되기도 한다. 실제 이완용은 [[경기도]] 출신이지만, 한국의 풍토상 유독 수도권 지역에는 지역드립에 관대한 [[이중잣대]]적인 경향이 있다 보니 이 쪽은 지역비하로 이어지는 경우가 드물다.], [[삼성그룹]]의 창업주 [[이병철]]에 관한 루머[* 애초에 '''경주 이씨'''인 이병철은 '''우봉 이씨'''인 이완용과 '''본관부터가 다르다.''' 이병철이 삼성 경영진들을 상대로 '전라도 사람은 뽑지 말며 뽑더라도 요직에 앉히지 말라' 운운했다는 썰. 당연히 사실무근인 루머에 불과하며, 당장 현재 삼성의 요직에도 전라도 출신들이 적지 않다.] 등이 있다. * [[이병도]]는 이완용과 같은 감찰공파(監察公派)긴 하지만, 공통 조상이 감찰공파 파조 이기(李圻)로 촌수로 따지면 무려 30촌이나 된다.[* 그나마도 이완용이 입양되기 전 생가 기준으로 하면 이완용은 참판공파(參判公派)인데다가 이병도와 이완용 간의 촌수는 36촌 지간으로 더욱 멀어지게 된다.] 이 정도면 그냥 남이다.[* 흔히 말하는 [[사돈의 팔촌]]이 예의상으로 따지는 친척 관계 중 가장 먼데 그보다도 훨씬 먼 사이다.] 25세 '병(丙)'자 돌림도 23세 '용(用)'자 돌림과 두 항렬 차이가 나니 조카는 절대 될 수 없다.[br]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이병도 개인의 행보는 동정의 여지가 없다. 일단 자신의 친일 행적도 그렇고, 이완용과 관계가 있음을 부정하기 위해 했던 짓,[* 예를 들어 박물관에 멀쩡히 전시 중이던 이완용의 관뚜껑을 태워없앤다든지. 이장할 때 나왔던 부장품 중 하나였다.] 이완용을 모 인터뷰에서 [[익산시|익산]]의 아들(?)로 만들려는 시도는 역사학자라 할 수 없는 저열한 짓이었다. * 루머의 마지막 피해자는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이다. 이완용의 손자인 이병철(李丙喆)과 삼성그룹의 이병철(李秉喆) 전 회장은 전혀 별개의 인물이다. '''본관도 다르다.''' 이완용의 손자 이병철은 작위를 세습한 [[이항구]]의 아들로서 우봉 이씨인 반면, '''삼성그룹 이병철 전 회장'''은 '''[[경주 이씨]]''' 판전공파에 의령 향반 출신인 이찬우의 아들이다. 이완용과 어떻게든 엮어보려고 이찬우를 이완용의 늦둥이 아들 정도로 끼워맞추려는 사람까지 보인다. * 졸렬한 행보와는 달리, 그를 개인적으로 알고 지냈던 사람들 사이에서는 배짱 있고 침착한 인간이었다는 평가가 많다. 지인과 함께 마당에 나와있는데 갑자기 마른 하늘에 벼락이 떨어져서 나무가 부러지는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놀라서 지붕 아래로 뛰어가는데 혼자만 태연하게 있으면서 "마른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것도 희귀한 일인데 같은 곳에 2번 떨어지는 건 더 드문 일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 고대 신화도 아니고 근대 실존 인물의 이야기이니 과학적인 시선으로 보면, '''매우 위험하다.''' 번개는 높이 솟은 물체에 집중적으로 내리치는 데다 이미 내리친 곳은 플라즈마화돼서 전도성이 더 좋고, 내리친 뒤 지면으로 퍼지기 때문에 신체와 바닥에 모두 접촉한 도체가 있다면 감전사했을 것이다. * [[이덕일]]은 "이완용이 [[노론]] 최후의 수장으로, 노론 세력을 대표해서 나라를 팔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노론이었으면 위의 인물들을 사면복권시켜 줄 리 없다. 사실 조선 말기부터 외척의 세도 정치가 활성화되면서 붕당정치는 완전히 종말을 고했고, 서인/동인/남인/북인/대북/소북/노론/소론/벽파/시파 따지는 게 의미가 없어졌다. 그마저도 혁파되고 아예 외세에 놀아나게 된 근대화 시기였으니 당연히 사실이 아니다. * 어렸을 당시에 총명했고 똑똑했던 인물이었다고 한다. 애초에 '''민족을 팔아넘길 정도면''' 똑똑함을 넘어선 머리인 것이다. 물론 그런 자신의 능력을 민족을 위해 사용했다면 모를까, 민족을 팔아넘기는 짓에 사용했다는 것이니 능력의 출중함을 따지는 것은 아무 소용 없다. 그야말로 [[곡학아세]]의 훌륭한 표본이다. * 이제는 자기 나라조차도 아닌 [[중국]]에서도 [[매국노]]로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중화민국 북경 정부 시절인 1921년, [[안직전쟁]]으로 [[돤치루이]]의 [[안휘군벌]]을 몰락시키며 중국의 패권을 잡은 [[봉천군벌]]과 [[직예군벌]]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었다. 이때 봉천군벌의 수장이던 [[장쭤린]]은 [[진윈펑]] 내각의 사퇴 이후 자신과 친한 교통계의 수장인 [[량스이]]를 국무총리에 임명,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일본에서 차관을 끌어들이려고 했다. 이게 당시 말 많던 산동반도의 소유권 문제하고도 연결되어 중국 사람들이 내부에서 반발이 심했다. 거기다 방금 전까지 적이던 돤치루이의 안휘파 인물을 대량으로 사면하기까지 하자 직예군벌의 수장이던 [[우페이푸]]는 이를 비난하면서 전보를 보내곤 과거 중국의 여러 매국노와 더불어 '''이완용'''을 같이 언급하면서 량스이를 욕한다.[* 물론 우페이푸 역시 그저 당대의 평범한 군벌 중 하나일 뿐이다. 다만 그는 중일전쟁 당시 일본과의 협력을 거부했기 때문에, 오늘날 중국에서도 최소한 항일 의식만큼은 있었던 것으로 그리 나쁘지 않은 평가를 내리기는 한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량스이는 기회를 틈타 내각을 차지했다. 일본 대표가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전일 의논한 것을 뒤집었는데 동경에서 주중국 일본 대사에 훈령한 것을 보면 외교부에 일본 차관을 요구토록 하고 일본이 추천한 사람을 쓰게 했다. 량스이는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여론을 고려하지도 않고 있다. 외직 경험도 없는 사람이 제멋대로 일본의 요구를 허락하고 철로를 되찾기 위해 마침내 차관을 일으키고 주미 각 대표가 이에 따르도록 훈령했다. 철로는 일본인 경영으로 귀속토록 하고 수천만 원의 채권을 일으켰다. 역대 내각이 하지 못했던 것을 서슴없이 그가 했다. 지난날 인민들의 통곡이 쌓여 있는데 그걸 무시하고 고집스럽게 일을 저질렀다. >국권이 희생되고 운송권이 중단되는 데 어찌 외인을 후대하고 어찌 조국을 원망하지 않겠는가? 량스이는 끼리끼리 무리 짓는 것을 지원하고 조종하며, 외세에 아첨하는 매국으로 '''이완용''', [[장방창]][* 북송시대 대신으로 금나라 병사가 개봉을 포위하자 화전을 주장하고 강왕과 함께 금나라로 인질로 갔다가 장초국 괴뢰황제로 세워진 인물이다. [[http://gil092003.egloos.com/9884214|참고. 보면 알겠지만 나라를 주도적으로 팔아먹은 이완용과 나란히 놓기엔 애매한 부분이 제법 있는 인물이며, 황제가 되려는 것을 거부했다가 금나라가 도시의 사람들 죽인다고 협박해서 어쩔 수 없이 된 것 인데다, 그마저도 도중에 도망쳤다.]] ]이 되었으니 동정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 남녀노소 전국 인민은 이민족이 우리 강토를 침략하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으니 간적을 물리치고 정의를 위해 용감히 앞으로 나가자. 모두가 지혜를 모으고 힘을 합쳐야만 한다. 바로 중국 대표에게 급전을 쳐 원래 계획을 밀고 나가도록 하자. > ------ > '만주군벌 장작림' 中 이렇게 전문에서 언급할 정도면 당대 [[중국인]]들이나 식자층도 '''"이완용 = 나라 팔아먹은 사람"'''이라고 인식했고 그 이름도 유명했다는 이야기.[* 당대 중국에서 일본 관련해서 조선 문제가 어떻게 되는지 상당히 관심을 많이 가지기도 했었지만.] * 충격적이게도 '''이완용이 [[배향공신]]이 되어 최소 5년 간 [[종묘]]에 모셔지는 대참사가 실제로 일어났다.''' 그가 사망한 직후인 1928년 5월에 [[대한제국]] 시기의 고위 관료와 황실 인사들이 후보 추천과 투표를 거쳐 [[순종(대한제국)|순종]]의 배향공신으로 송근수, 김병시, 이경직, 서정순 4인을 정한 후, 순종의 후사였던 황태자 [[이은]]에게 보고하고 결재를 받았다.[*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3일자 '四人抄啓別單書入之意敢稟答曰知道' 4인을 초계하여 별단으로 들이니 품의에 대해 답하시기를 알았다.] 그러나 며칠 후 이왕직 장관 [[한창수]][* 역시 일제강점기 때의 악질 친일파 중 하나이다.]의 주장에 따라 김병시, 이경직이 보류되고 이완용이 추가되었고[*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 상권 하교급품의(下敎及上稟) 5월 9일 '下敎曰忠文公金炳始忠肅公李耕稙姑爲保留內 閣總理大臣李完用添書以入' 하교하기를, 충문공 김병시, 충숙공 이경직을 보류하고,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을 추가 기재하여 넣으라.], 배향공신 논의에 참여했던 고위 관료 출신과 황실 인사들이 이에 반발하자 7월에 이왕직은 배향공신의 종묘 배향을 일단 보류했다. 하지만 1940년 3월 11일에 송근수, 12일에 이완용, 13일에 서정순을 종묘에 배향하는 의식을 정식으로 치렀으며[* 종묘숙직일지(宗廟宿直日誌) 1940년 3월 11일, 12일, 13일 기사], 이왕직에서 간행한 기록물에 이를 등재했다. 물론 1945년 해방 후에 이완용의 신위는 당연히 출향되었다. 김병시, 이경직의 종묘 배향이 정식으로 진행되었는지 여부가 분명하지 않아서 다수 기록물에 순종의 배향공신이 송근수, 서정순 2인만 기재되어 있다. * 매우 부정적인 의미로 유명하다 보니, 괜히 죄 없는 후대의 동명이인들의 삶을 불행하게 만들어서 더욱 비난을 받기도 한다. [[대한민국]]에서 이미 이완용이란 이름은 '''배신과 매국의 상징이 돼버린 것이다.''' 다른 매국노들은 몰라도 이완용은 이름만 들어도 "아, 그 매국노?"라고 할 정도로 [[매국노|다른 방향]]으로 유명해진 사람.[* 하지만 당연히 그런 이름을 지어준 부모의 책임도 존재한다.] * 동명이인은 물론 이름이 똑같거나 연상이 될 정도로 비슷한 이름이라서 주변으로부터 피해를 당해 개명신청을 한다면 범죄자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거의 100% 허가해 준다고 봐도 되는데, 개명 허가받기 힘들던 2000년도 이전에도 웬만해선 허가해 줄 정도였다. * 같은 시대에 살던 왕실 종친 중 [[이완용(1872)|동명이인]]이 있었는데 하필 이 사람도 조선귀족 자작 위를 받은 친일파다. * 이름이 이완용이란 이유로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TV로 나올 정도다. [[http://mlbpark.donga.com/mlbpark/b.php?&b=bullpen2&id=1581146|#]] 물론 일부 방송 프로그램에 의하면 이름 때문에 하도 놀림을 받아 이미 해탈했는지 그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이름이라고 좋은 쪽으로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는 듯 하다. [[https://www.clien.net/service/board/park/10575362|(링크의 마지막 이미지)]] * 동명이인이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 나왔는데, 그 이완용 후보는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 *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다른 이완용 후보가 출마했는데, 이 사람도 뒤에서 1등으로 낙선했다. * 매국노의 동명이인이 박한 취급을 받는 사례는 다른 나라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다. * [[미국]]의 경우 독립전쟁 당시 [[영국]]과 내통하여 반역을 저지른 [[베네딕트 아놀드]]와 이름이 같은 동명이인들은 종전 200여 년이 넘은 지금도 까이기도 한다. * 이완용이 베네딕트 아놀드의 이름과 비슷해질 거라는 예언은 [[윤치호]]가 했는데, 11월 17일자 윤치호 일기를 본다면, 그 조약에 서명한 사람은 미국인들이 베네딕트 아놀드를 혐오하듯이 혐오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 중국의 경우 [[진회]]가 여기에 해당.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중국인들은 이름에 '회'(檜)를 넣지 않는다. * [[독일]]의 경우도 아돌프라는 이름이 과거에는 흔했으나, [[아돌프 히틀러]]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쓰이지 않으며 이미 아돌프라는 이름을 쓰고 있던 사람들도 절대다수가 개명을 했다. 실제로 미국의 한 [[막장 부모]]가 첫째 자녀의 이름을 '아돌프 히틀러'로 지었다가 '''[[아동 학대]]로 간주되어''' 실형을 선고받고 4명의 자녀들에 대한 '''양육권을 박탈''' 당했던 사례가 있다. * 얼마나 악질이었는지 같은 [[친일반민족행위자]]들 사이에서조차 [[아싸(신조어)|아싸]] 신세였다고 한다. 물론 생전 [[일본어]]를 한 마디도 할 줄 몰랐던 것이나 일본인 인맥을 넓히려 하지도 않았던 것 때문에 친일파 내에서도 부정적으로 볼 여지와 별개로, 이완용이 상당히 악질적인데다 사회성과 대인관계도 그다지 좋지 못했던 인물이란 것을 바로 파악할 수 있는 사항. * 2011년 5월 20일 이완용에 대한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출판되었다. 저자에 따르면, 이완용은 '합리적인 근대인'이었기에 '충군(忠君)'과 '애국'을 위해 용기를 내거나 분노하기보다는 절대로 분노하지 않는 이성적 인간이었다. 그로 인해 [[을사조약]]과 한일병합조약을 주도하면서 평소 자신의 소신이었던 황제와 황실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고 한다.[[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11052701032530065002|#]] 이로 인해 김윤희의 <이완용 평전>이 이완용을 옹호하고 재평가한 매국행위 변론 서적이라는 낭설이 있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김윤희가 이 책에서 보여주려고 한 것은 '''[[아돌프 아이히만|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근대의 이성을 비판 없이 충실히 따라갔을 때]] 얼마나 [[친일반민족행위자|가증스런]] [[역적]]이 탄생하는지'''를 보여주려고 한 것이다. "바로 이완용과 근대에 대한 '''진짜 비판'''을 가하려고 한 것."이라고는 하는데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리는 듯 하다. * 2013년 1월 중순경 위키피디아 한국어 버전 이완용 문서에 이완용을 매국노로 평가한 부분을 삭제하고 조선을 [[식민지 근대화론|근대화시킨]] 위인이라는 류의 내용을 추가하며 미화하려는 지속적인 반달이 행해졌다. [[http://ko.wikipedia.org/w/index.php?title=%EC%9D%B4%EC%99%84%EC%9A%A9&action=history|(정보없음 부분)]] 이후로도 잊혀질 때마다 특정인들에 의해 문서가 훼손되고 있으며, 이는 본 문서도 마찬가지라 편집에 1단계 제한이 적용되었다. * [[전라북도]] [[부안군]]에는 이완용을 칭송하는 공덕비가 있었다. 일단 '''이건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기 전에 세워진 거'''다. 대략 1898년, 부안군 줄포면에 큰 [[해일]]이 밀어닥쳐 수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당시 [[전라북도]] 관찰사였던 이완용이 직접 부안으로 내려와 참상을 시찰하고 제방을 중수토록 지시했고, 그 결과 오늘날의 줄포 시가지가 생길 수 있었다. 이를 기리기 위해 공덕비를 세웠는데, 이후 이완용이 매국노가 됨으로서 이러한 공덕은 사실상 무의미해졌고, 역시나 광복 후 이 공덕비는 수차례 수난을 당했으며, 본래 서 있던 자리가 아닌 줄포면사무소 뒤편에 반파된 채로 보관되고 있다고. * 의외로 관료로서의 이완용과 지식인으로서의 이완용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정적이고 그 누구도 부정하지 않는다'''.[* 참고로 [[구한말]]은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매우 흔한 혼란의 시기였다.] 실제로 이완용의 업무 스타일은 '''해당 지역을 직접 방문하여 실사구시를 내세우며 문제를 해결하는 스타일'''이다. [[대한제국]]에 대한 애국심만 투철했더라면 꺼져가는 조선의 명운을 되살릴 만한 유능한 인재였음을 부정할 수가 없다. 사실 이완용과 [[이토 히로부미]]가 한국인에게 진심으로 증오받고 욕먹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을사늑약]]이다. 그 이전에 죽었거나 중립적인 침묵만 지키고 국권피탈에 협력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역적으로 낙인찍힐 일은 없었다'''.[* 사실 중립적으로 있다가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박제순|강제로 찬성으로 간주된 경우]]도 있지만.] 오히려 그럭저럭한 일생을 보냈고 [[한규설|을사조약 참여를 거부하거나]] [[민영환|자결로 항거하였다면]] 을사의인이라 존경받고 훌륭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 [[서울특별시]] [[종로구]] 옥인동 19번지는 2003년 건축된 이완용과는 전혀 관련 없는 건물이다. [[http://m.ilyo.co.kr/?ac=article_view&entry_id=300558|출처]].실제 이완용의 자택이 옥인동에 존재했던 것은 사실이나 해당 건물은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그 집터에는 옥인교회 · 아름다운재단 · 길담서원 등이 들어서 있다. * 심지어 죽을 때도 일제에 자신의 재산을 바쳤다. 다른 사안에는 유언을 남기지 않았으나, 재산 문제에만 분명한 유언을 남겨서, 당시 총독이었던 [[사이토 마코토]]에게 사회사업 기부금으로 3만 원이 전달 되었다고.[* "이완용은 죽기 전에 특별한 유언을 남기지 않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단지 재산 문제에 대해서는 분명한 유언이 있었다 하는데, 죽은 지 며칠 후인 16일 그의 유언에 의해 사회 사업 기부금으로 3만 원이 [[사이토 마코토|사이토 총독]]에게 전달되었다." - 역사비평(계간 22호, 1993년 가을)에 실린 임대식의 "이완용의 변신과정과 재산축적" 164쪽. [[https://namu.wiki/thread/WryHighVictoriousVest#1|을 참조.]]] * 아들에게 유언으로 "내가 보니까 앞으로 [[미국]]이 득세할 것 같으니 너는 친미가 되거라" 라고 했다는 설이 있었으나, 알고 보니 [[엔하위키]] 시기에 벌어진 '''[[문서 훼손]]이 최초 출처'''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정확히는 [[https://namu.wiki/thread/WryHighVictoriousVest|4순위 근거를 반영하는 주장과 관련된 토론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는 로그 중 가장 오래된 시기인 2011년 7월 이전에는 해당 어록이 아예 발견되지 않은 게 확인되면서 발굴되었고, 그 전 엔 퍼진 게 없던 것이 발견된 것.[* 이완용의 행적을 살펴보면 저런 유언을 남기고도 남은 인물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사실 이완용은 '''죽을 때까지 일제의 앞잡이이자 사냥개로 살았다'''.] 그 사이에 상당히 퍼진것이 확인되고, 문헌 오염 당한 내용 자체가 화제가 된 경우였던 데다, 제도권 언론사 [[MBC]] [[https://youtu.be/JSUYuo-WFgU?t=146|에서도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을 정도.[* 그래서 "단, [[나무위키]] 문서에 대한 훼손 및 조작 사건이 [[나무위키:편집지침/등재 기준]]의 [[나무위키:편집지침/등재 기준#s-10.1.1|10.1.1 단독문서를 위한 등재기준]]을 만족하는 경우, 훼손되거나 조작된 문서에 훼손 및 조작 사실을 명시하여 이를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를 적용.] 다만, 해당 문서 훼손은 엔하위키 로그 중, 로그가 누락 된 부분에서 발생한 것이 나무위키에 크롤링 될 때 넘어온 것 이라서, 문서 훼손의 정확한 주체를 파악 할 수는 없으나, [[문헌오염]] 자체는 [[친미]]를 비난할 목적으로 인용되거나[* 특히 [[한미자유무역협정]] 관련.], [[일뽕]]들이 이완용을 재평가하자고 주장할 목적으로 인용하는 등, 문헌 오염 자체는 성향에 관계 없이 발생하였다. [[파일:Yamagata_Aritomo.jpg|width=300px]] * 이 사진이 이완용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기도 하나, 이 사진의 인물은 일본의 제3·9대 내각총리대신 [[야마가타 아리토모]]로 이완용의 사진이 아니다. * 안타깝게도 [[이재명(독립운동가)|이재명]] 의사가 죽일 수 있을 뻔했으나 그 당시 일본에서 매우 높은 위치였기 때문에, 수술을 받아서 극적으로 살아남았고, 대신 한국 최초의 [[흉부외과]] 수술을 받았다는 업적 아닌 업적을 얻었다고 한다. [[김구]] 선생이 이재명 의사가 21살이어서 총을 빼앗았으나 결국 칼로 시도하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이재명(독립운동가)|이재명]] 의사가 체포되고 나서 [[김구]]가 엄청 후회를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암살하려 한 곳은 서울 종현천주교회당(오늘날 [[명동성당]])인데, 이완용은 여기에서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 동 시대에 같은 이름의 친일파가 있었다. 종실 [[이완용(1872)|이완용]]으로, [[사도세자]]의 3남 [[은언군]]의 현손이자 봉사손이다. 다만 이름 끝 글자의 한자가 다르다. 이 문서의 이완용은 '李完'''用''''으로 쓰지만 동명이인 이완용은 '李完'''鎔''''으로 쓴다. * "좋은 전쟁보다 나쁜 평화가 낫다."는 말을 이완용이 했다는 말이 돌지만, 실제로 이완용이 한 말은 아니다. [[https://v.daum.net/v/20220227135400829|#]]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