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용상 (문단 편집) === 몽골군과의 전투 === 전반적인 내용은 옹진군 화산동리에 있는 <수항문기적비>[* 1903년에 만들어졌다.]에 적힌 내용을 기반한 《화산이씨세보》에서 가져왔다. 고려측 기록에는 이용상과 몽골군과의 전투에 대한 기록이 없다. 1253년 12월, 이용상은 옹진성 동쪽 화산에 살고 있었는데, 고을 수령이 그에게 달려와서 [[몽골군]]이 쳐들어왔다고 위급을 호소하며 이를 물리칠 계책과 도움을 요청했다. 이에 이용상은 수락하여 위효관이라는 사람과 함께 부대를 나누어 성을 지키는 수성 전략을 세웠다. 3면에 토성으로 성벽을 쌓고 전면에 목책을 높이 세웠다. 현재 옹진에 있는 화산성이 그것이다. 이용상은 동굴을 파서 땔감과 나무를 비축하고 몽골군이 대포[* 이 시기 대포는 화약을 쓰는 대포가 아니라 [[투석기]]다. <수항문 기적비>의 건립 시기를 감안하면 고려시대때 공성용 화약무기가 실존했는지의 여부를 딱히 고려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를 쏘면 함께 쏘고, 성벽을 넘으면 돌과 뜨거운 물을 부어서 철저히 방비했다. [[몽골군]]이 5개월 이상 공격했지만 함락되지 않았다. 전투가 오래 계속되자, 몽골 장수는 꾀를 내서 항복하는 체하고 화친을 요구한다며 황금을 가득 담은 상자 5개를 선물로 보내왔다. 이용상과 마을의 수령은 망대를 높이 쌓아 위엄을 보인 가운데 항복을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몽골군]]이 상자를 보내오자, 이용상은 이에 의심을 하여 상자를 묶고, 구멍을 뚫도록 명령을 내렸다. 구멍을 뚫어보니 한 사람의 자객이 있었다. 이용상은 그 구멍에 펄펄 끓는 물을 붓도록 명령했다. 자객이 죽고, 그 상자를 금종이로 바른 후 적진에 도로 던져주라고 했다. 몽골군 장수는 상자를 도로 받은 후에 깜짝 놀라 군사를 급히 돌렸다. 그러나 이용상의 지시로 매복한 고려군 병사들이 기습하여 몽골군을 격파하고, 수백명의 포로를 사로잡았다. 상당히 비슷한 이야기가 [[중국]]의 [[남북조시대]]에 존재한다. 당시 [[동위]](東魏)는 [[서위]](西魏)에 맞서 중국 대륙을 통일할 야욕을 갖고, 40만 대군을 이끌고 서위의 요충지를 공격하여 서위군의 기세를 끊으려 했는데, 군사 기지이자 교통의 요충인 옥벽(玉壁)을 지키는 수문장이었던 서위의 장수 '''위효관'''(韋孝寬)[* '효관'은 그의 자(字)이며, 본명은 '관'(寬). 일명 '숙유'(叔裕).]에 의해 좌절되었다. 위효관이 옥벽에서 일궈낸 화공 방어전술과 이용상의 방어전술에 비슷한 점이 많고, 동위의 항복계략과 몽골의 항복계략이 서로 일치한다. 이로 보아 위효관이라는 인물의 일화를 차용해서 이용상 황자의 후손들이 선조의 업적을 극대화했을 수도 있다. 조선의 의병 장군으로 활약한 [[곽재우]]도 비슷한 일화를 남겼으니 어쩌면 이용상과 곽재우 두 사람 역시 공성전의 귀재로 꼽힌 위효관의 묘책을 당시에 실제로 활용 및 응용하여 전투에 임하여 대승을 거두었다는 결과물로도 볼 수가 있다. 또한 당시의 논공행상 관련 기사가 남아 있으므로 결론적으로 보면 이용상의 지략과 용맹은 남북조시대의 장군 위효관에 비견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있다. 고종은 보고를 받고 이용상을 포상하여 관직을 높이고 옹진 화산 지방 30리 인근과 식읍 2,000호를 하사했다. 또한 리 왕조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도록 제수를 많이 내리고 화산관의 문미에 수항문(受降門)이란 글자를 써서 내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