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용희(1931) (문단 편집) === 1980년대~2000년대 === 1980년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약 두 달 동안 모진 고초를 겪고 풀려났다. 같은 해 정치규제를 당하였다가 1984년 해금되었다. 정치규제 기간에는 [[진로(브랜드)|진로주조]] [[고문]]을 역임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박준병]]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김녹영]]의 별세로 공석이 된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 선거에 동교동계의 지원으로 출마하였으나 비 동교동계, 비 상도동계인 [[김옥선]] 등의 반대로 [[조연하]]에게 밀려 탈락하였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가 다시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를 옮겨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김명섭]]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에 절차상의 이유로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해서 승소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89년 치러진 [[재보궐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이번에는 민주정의당 [[나웅배]]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민주당(1991년)|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지사]]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주병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괴산군|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자유민주연합]] [[어준선]] 후보에 밀렸고,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충청북도 보은군-옥천군-영동군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한나라당]] [[심규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 심규철 후보에 설욕하여 당선되었고, 이로써 12대 총선 이후 장장 16년 만에 국회 복귀에 성공했다. 같은 해부터 2006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행정안전위원회|행정자치위원장]]을, 2006년부터 2008년까지는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후보를 지지하여 [[보은군]]에서 호남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정동영이 [[이명박]]을 제치고 1위를 기록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지역구]]에서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실제로도 지역에 방문한다는 연락이 있으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인다. 당시 "이 동네는 40년 동안 이용희를 보고 [[윤보선]], [[김대중]], [[노무현]], [[정동영]]을 찍은 곳이에요."라는 지역유권자의 인터뷰 기사까지 나왔을 정도.][* 그러나 경선 당시에는 [[손학규]], [[이해찬]] 캠프 측에 의해 지역구에서 [[박스떼기|부정 동원 경선]]이 일어났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http://m.dcinside.com/view.php?id=lhc&no=47|#]] 덧붙여 국감장에서 공개적으로 박스떼기를 잘 봐달라고 발언해 논란이 되기도 했다.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46604.html?_fr=gg|#]]]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통합민주당(2008년)|통합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자 민주당을 탈당하고 [[자유선진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