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원국 (문단 편집) === 일본에서 미국, 멕시코로 가다 === 3학년에 올라간 다음 해 봄 이원국은 뜻밖의 인물을 만났다. 서울에서 열린 아시아영화제에 참가한 일본 다이에이 영화사의 대표 겸 [[일본프로야구]] 팀 [[치바 롯데 마린즈|도쿄 오리온즈]]의 구단주인 [[나가타 마사이치]][* 그는 평소 허풍이 심해서 일본 야구계에서 나가타 나팔 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기자들도 그의 말은 반 정도만 믿고 기사를 쓸 정도였으니. 또한 다혈질의 과격한 성격으로 1960년 [[일본시리즈]] 준우승 보고 차 찾아온 [[니시모토 유키오]] 감독에게 '이 멍청한 자식아' 라고 상소리를 퍼붓는 바람에 뚜껑이 열린 니시모토는 1년만에 [[치바 롯데 마린즈|다이마이]] 감독직을 내던졌다.]가 이원국을 찾아온 것이다. 그 전 해 지구별 초청대회 우승 시 서울에 와 있던 나가타는 이 경기를 보고 이원국에게 반하여 스카우트에 나섰다. [[파일:external/archive.today/a526ecbe64d79535ddc2c45a0536cb282a9a2549.jpg]] 도쿄 오리온즈 입단식에서의 이원국. 오른쪽은 구단주 [[나가타 마사이치]]. 재학 중이었던 그 해 6월, 이원국은 일본으로 건너갔고 졸업을 한 다음 해 봄 정식으로 오리온즈에 입단했다. 4년 전 [[백인천]]에 이어 두 번째로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대한민국 출생 선수가 된 것이다.[* 일제 시대에 태어나서 도일하여 1940년대 일본프로야구를 경험한 선수는 몇 있다. 대표적으로 한국 야구 역사 초창기 발전에 많은 도움을 준 김영조 씨 등.] 등록명은 본인 이름의 한문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리 겐코쿠이다. 오리온즈 2군에서 훈련하면서 경기에 나갔던 이원국은 새로 제정된 외국인선수 규정에 걸리고 일본선수들의 심한 견제로 1군 승격이 어려웠지만 가까스로 1967년 시즌 후반기에 1군에 승격하며 1967년 8월 19일 [[한큐 브레이브스]] 전에 1군 공식경기에 등판했지만 1.1이닝 2실점 평균자책점 18.00의 부진한 투구내용을 기록하며 이 경기가 일본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등판이 되었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는 일본 리그에서는 [[스위치 투수|양손 투수]]로 데뷔를 시도하였으나 이후에는 결과적으로 우완으로 전향하였다. 사실 1960년대 중반 샌프란시스코는 몇 명의 일본 선수들을 연수 차원에서 받았던 적이 있었다. 대표적인 선수가 1964년~5년 사이 메이저리그에서 20살의 나이로 활약한 일본 최초의 빅리거 [[무라카미 마사노리]]이며 이외에도 매년 자이언츠 애리조나 교육리그 캠프 (현재로 치면 루키 레벨 정도에 해당하는 느낌의 겨울캠프) 에 교류 형식의 연수가 팀과 무관하게 이루어져 왔었다. 도쿄 오리온즈는 이원국이 외인TO 신설로 붕 떠버리자 사실상 처분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와사키 타다요시와 함께 연수 명목으로 이 샌프란시스코 겨울루키캠프에 보내버린다. 타다요시는 그해 바로 여름에 귀국해 1군에 곧 정착했지만, 이원국은 그 곳에 남아서 정착했다.[* 이후 도쿄 오리온스는 롯데가 인수하면서 지바 롯데로 이름을 변경했고, 이원국과는 자연스럽게 이별에 성공했다.] 이원국은 1968년 초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마이너리그 계약을 통해 입단해 [* 시카고 컵스 마이너리그 이야기가 있으나, 어떤 공식 기록에도 확인되지 않으며 한국 블로그에만 나오는 정보이다.] 출전했다.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1968년 마이너리거가 된 이원국은 프레스노 자이언츠 (A) 팀에서 7승10패 ERA 3.94를 기록했으며 타석에서는 타율.166 1홈런을 기록했다. 만 20세로 어린 나이로 애매한 기록을 내서 싱글 A 재수를 택하게 된 이원국은 1969년에는 중계 및 마무리로 나와 5승5패 8세이브 ERA 3.44를 기록했으며 102이닝 106삼진의 좋은 투구를 보였다. 이 때문에 시즌 후 룰5 드래프트의 더블 A 단계에서 [[디트로이트 타이거스]] 의 선택을 받았다. 이후 모종의 과정을 거쳐[*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으나, 타이거즈 AA 로스터 사정으로 인한 트레이드 내지는 선수 이동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밀워키/몬트리올 공동산하구단 (AA) 잭슨빌 선즈에서 뛰었다. 1970년 만 22세의 이원국은 4승7패 ERA 3.71을 기록하였다. 이후 방출된 이원국은 여러 시도를 하던 중 멕시코행을 택하게 된다. [[파일:external/www.iworldtoday.com/179325_53303_3758.jpg]] 피라타스 데 사비나스 시절. 1971시즌을 쉰 이후, 1972년 5월 [[멕시코 프로야구 리그]][* 정확히는, 멕시코의 하계/동계(멕시칸퍼시픽리그)) 리그를 모두 뛰었다.]로 건너가 에르네스토 카를로스(Ernesto Carlos 또는, Ernesto Carlos Kuk Lee)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멕시코에서 11년 간 뛰었다. 1972년 피라타스 데 사비냐스에서 11승11패 ERA 3.27, 1973년 사비냐스와 사티요에서 16승 13패 ERA 2.30(리그 7위)을 기록하며 순식간에 그는 멕시코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이 되었다. 1974년 그는 미네로스 데 코아후이아로 이적하여 16승14패 ERA 3.08을 기록한다. 1975년은 그야말로 악운이 지배한 해였다. 7승 20패 (리그 다패 1위) ERA 3.33의 성적을 기록했다. 다음해 다시 반등한 이원국은 76년 16승9패 ERA 2.29(리그 11위) 및 212이닝동안 피홈런 5개의 경이적 기록을 냈다. 77년 16-10, ERA 3.51을 78년 13승13패3세이브 ERA 2.8을 기록하는 등 이원국은 꾸준히 프런트라인 선발투수의 재능을 보여주었다. 당시로서는 투수로 노장인 31세가 된 이원국은 멈추지 않았다. 37게임 35선발(리그1위) 24완봉 277이닝(리그 1위) 19승 14패 174삼진 70볼넷 ERA 2.53을 기록했다. 다만 피안타 수도 285개로 1위로 점차 나이가 먹어가며 피칭 스타일 자체는 맞춰잡는 유형으로 변해갔다. 그럼에도 1980년대 들어서도 그의 엄청난 기록은 멈출 줄 몰랐다. 1980년 몬클로바와 페트롤레로스 데 포차 리카에서 10승9패 ERA 3.38을 기록했으며 1981년에는 1981년 18승(리그 2위) 11패 ERA 2.36으로 노익장을 과시하며 엄청난 실적을 냈다. 1982년의 활약은 기록상으로는 매우 좋았다. 포차 리카에서 7승4패 ERA 1.98(리그 5위). 다만 기록에서도 보이듯 소화 경기 숫자가 많지 않았으며 이때 이미 약간의 노화 징후가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한편 당시 기록의 미비 문제인지, 어느 쪽에서인가의 해석의 문제인지 모르겠으나 통산 기록은 한국 측 기록과 멕시코 측 기록이 다른데[* 다만 위의 상세한 미국 측 연도별 기록을 본다면 어느 쪽이 맞은지는 한국 측의 150승 85패는 실력과 관계 없이 너무 승수가 많은 느낌이기도 하고 일단 양측을 모두 기재한다.] 한국 측 기록은 150승 85패, 멕시코/미국 측 기록은 336게임 149승 128패 8세이브 1126탈삼진 154완투 33완봉 통산 평균자책점 2.81이다. 윈터리그인 멕시칸 퍼시픽리그에서는 통산 16승 23패 평균자책점 2.97 161탈삼진을 기록했다. 멕시칸리그 평균자책점 2.81은 멕시칸리그에서 2000이닝 이상 선수 중 역대 4위라고 한다. (1-2위는 메이저리그 경력자) 그 실적에 걸맞게 최우수선수상, 철완투수상을 수상, 멕시코에서는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