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원복 (문단 편집) === 일생 === [[1946년]] [[10월 4일]] 충남 대전부(現 [[대전광역시]] [[중구(대전광역시)|중구]])에서 공장과 여관을 경영하던 집안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한때 이원복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여관은 유명 영화배우들이 촬영차 내려가서 꼭 묵었을 정도로 크게 번성하여 여유로운 시절을 보냈으나, 1950년 [[6.25 전쟁]]이 터지면서 집안이 몰락하여 1955년에 서울로 상경 후 사글세방을 전전하면서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이 와중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10살 때와 20살 때에 잃는 비극을 겪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자 1966년에 생계를 위해 큰형 이정복이 [[서독]]으로 [[철학]] 공부를 떠난 뒤 손아랫 형들도 줄줄이 서독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한편 이원복은 가족들과 함께 [[서울]]로 상경한 뒤 공덕초등학교를 2년 다니다가 동대문초등학교로 전학했고, 그는 어린 시절 내내 [[만화방]]을 드나들며 만화라는 만화는 다 탐독했다. 그 중에서도 [[김종래]]의 <엄마 찾아 삼만리>를 감명깊게 보았으며, 박기당의 만화도 즐겨 읽었다고 한다. 1959년 경기중학교로 진학한 후 만화를 보면서 다져진 미술적 감각으로 미술부 활동을 했으나, 집안 사정이 사정인지라 미술 도구를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만화에 대한 관심이 커진 탓인지 정물화나 풍경화에도 싫증을 느끼기도 했다. 그럴 즈음에 중2때 학교 신문에 첫 만화 작품이 실리기도 했고, [[경기고등학교]]에 진학하자마자 소년한국일보 편집국 직원 아들인 친구의 소개로 소년한국일보로 간다. 그때 그의 그림 솜씨를 눈여겨본 조풍연(1914~1991) 주간이 어린이 신문 만화를 맡기면서 프로 만화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63년에 [[미국 만화]] <아이반호>의 트레이싱을 시작으로 <톰 소여의 모험>, <마르코 폴로> 등의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만화를 모사하는 정도에서 그쳤으나 1964년부터 [[일본 만화]]의 윤작인 <수나>, <사랑의 선물> 등에 이르러서부터 종이에 펜 스케치 뒤 펜터치로 상세 묘사를 하는 수준으로 발전함으로 그림 실력이 나아지면서 창작만화를 그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고교 시절 학업보다 만화를 그리는 아르바이트에 빠진 탓인지 대학 진학에는 실패했다. 1년을 재수한 끝에 1966년에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건축공학과]]에 들어가 6년간 학교를 다녔지만 만화 그리는 작업을 계속하느라 학업(전공)에는 소홀하여 졸업은 하지 못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새소년> 등지에서 '성천경', '이상권' 등의 필명을 써가며 활동한다. 해당 필명들은 이원복 교수의 친구들 이름에서 따왔다. 일본식 그림체를 차용하여 감동극화물, 모험물, 개그물, 로봇물 등을 전전하며 만화를 그려오다 1975년에 만화를 본격적으로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서독 뮌스터 대학교로 유학을 떠나 1981년까지 6년간 배우면서 자신만의 그림체를 찾아내게 되었다. 1981년에 뮌스터 대학교 졸업 이후 <[[먼나라 이웃나라]]>를 그릴 적에도 계속 유럽에 체류하다 형들의 권유로 1984년에 귀국하여 [[덕성여대]] 산업미술학과(현 시각디자인학과) 교수로 부임한 뒤 교양만화 하나에 몰두하는 한편, 김승민 작가 등 후학들을 양성하는 데 힘썼다. 이들 중 김승민 등 일부 제자들은 일러스트레이터 그룹 '그림떼'를 결성했다. 또 1986년 서독 뮌스터 시와 코츠펠트 시의 초청으로 자신의 작품들을 내걸어 개인전을 연 바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