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위종 (문단 편집) === 이후의 활동 ===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을 돕는 것으로 외교관 활동을 시작했고 짧은 생애 중 대부분을 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도왔다. 이범진은 [[을사조약]] 체결 이후에도 [[러시아 제국]]의 연금을 받으면서 공관을 버리고 [[아파트]]로 옮겨 [[여권]] 발급 등의 공사 업무를 계속했다. [[연해주]] 지역의 [[독립운동]] 기지를 돕는 것도 주요한 일이었는데 수입원이 없어 러시아 정부의 [[연금]]을 받는 상황[* 러시아 제국은 한국과 대등한 외교 관계를 지속한다는 의미에서 이범진에게 소환령이 떨어진 후에도 연금을 지급했다. 을사조약 체결 이후 연금 지급 기한 만기가 다가오자 대한제국에서 온 공사가 생계 수단을 확보하지 못한 채로 방치당하는건 [[자존심]] 문제라는 이유로 2년간 연금 추가 지급을 약속했다.]에서도 계속해서 신한촌 등에 자금 지원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한인]] 신문 창간 등을 주장하고 지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이 시기 연해주에서 크게 활약했던 전 [[간도]] 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과 형제였는데 러시아 측 자료에 의하면 이범윤과 이위종은 당시 일본의 항의를 받아 연해주 일대의 한인 [[사회]]를 감시하던 러시아 측의 요주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1908년 이위종은 아버지 이범진이 들려준 군자금 1만 루블을 들고 장인 놀켄 남작[* 러시아 토볼 주의 [[총독]]이었다고 한다.]과 함께 연해주를 방문했다. 연해주 한인 사회에서 [[리더]] 격으로 부상한 [[최재형(독립운동가)|최재형]]과 전 간도 관리사 이범윤을 중심으로 '동의회(同義會)'라는 [[의병]] 조직이 구성되었는데 이위종은 자금 지원과 함께 이 조직의 회장으로 중심적인 활약을 했다. 1908년 7월 [[함경북도]] [[회령시|회령]]과 [[경성군|경성]] 등지로 진출하기도 했으며[[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29&contents_id=5983&leafId=129|#]] 블라디보스토크 경찰부장은 이위종을 감시하라는 명령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이렇게 끈질기던 이범진도 [[경술국치]] 소식에 끝내는 탈진했는지 [[유서]]를 남기고 목을 매단 채 [[권총]]을 쏘아 [[자살]]했다. 이위종은 아버지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북쪽 교외의 우스펜스키 [[공동묘지]]에 안장했다. >한국, 서울, 덕수궁 > >황제 폐하께 >"우리 나라 대한 제국은 망했습니다. 폐하는 모든 권력을 잃었습니다. 저는 적을 토벌할 수도, 복수할 수도 없는 이 상황에서 깊은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자결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 목숨을 끊으렵니다." 1911년 아버지가 사망한 그 해 이위종은 러시아 블라디미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했는데 이때 러시아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보인다. 1912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을 방문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나 이후의 행적은 분명하지 않다. 1916년 블라디미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군의 [[장교]]인 소위보로 임관한 이위종은 당시 [[제1차 세계 대전]] 와중이었기 때문에 동부전선에 배치되었으며 부인 놀켄 여사는 1917년 이위종의 전사 통지서를 받았다. 놀켄 여사는 그의 사인이 전투 중 사망인지, 자살인지, 피살인지 확인하려고 애썼지만 사인은커녕 정확한 사망 지역도 알아낼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살아 있었고 1918년 초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체결과 함께 러시아군의 동원 해제가 이루어지자 [[모스크바]]로 귀환했다. 1918년 5월 [[러시아 내전]]이 본격화되자 그는 놀랍게도 [[볼셰비키]] 당에 입당하고 [[붉은 군대]] 산하 '제3국제연대'에 입대했다. 이후 '우랄기관총연대'에서 지휘관으로 활동하면서 1920년 초 [[알렉산드르 콜차크]]의 백군을 격퇴해 [[이르쿠츠크]] 탈환에 공훈을 세웠다. 일본 밀정 [[보고서]]에서는 '모스크바에서 이르쿠츠크에 이르는 모든 재러시아 한인들의 [[두목]]'으로 묘사된다. 일제가 그만큼 경계할 정도로 거물급 지도자였던 모양.[* 이위종이 한인 7,800명을 징집했다고 보고하는데 일본군은 이를 과장된 것이라고 받아들였다. 당장 1918년 블라디보스토크 일본 총영사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제국이 1차 대전 당시 동원한 한인이 장교 약 100명과 하사관 및 사병 4,034명이었는데 이위종이 7,800명을 징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르쿠츠크 탈환 이후 이위종은 군을 나와 [[크라스노야르스크]], [[치타]] 등지에서 [[공산당]] 간부로 활동했다. 그가 [[자서전]]을 공산당에 제출한 것은 1924년이고 아쉽게도 이후의 행적은 전혀 알 수 없다. 이 모든 행적이 [[가족]]들에게조차 알려져있지 않았던 이유는 1917년 이후 가족들과 연락을 끊고 오로지 [[혁명]] 활동에만 투신했기 때문이다.[* 1911년 부친의 자결 이후 처자식의 생계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안 쓴 모양이다. 이범진의 사후에도 그가 받던 연금이 이위종에게 일부나마 지급되고 있었는데 1915년 이위종의 아내가 러시아 정부에 연금을 자신과 자식들을 위해 달라는 청원을 보낸 문서가 남아 있다.] 그는 자서전에조차 처자식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조국 해방과 [[세계]] 혁명에 모든 것을 바친 모양.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