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의민 (문단 편집) === 무신정권의 집권자 === [include(틀:무신 정권 기구)] ||<-3><:>'''{{{#white 집권 시기 이의민의 관직}}}''' || ||<:><|4>'''{{{#white 직위}}}''' ||<(> 공부상서(工部尙書) ||<(> 상서공부의 장관이다. || ||<(> 좌복야(左僕射) ||<(> 공부상서에서 승진. 복야 계열의 직위. 중서문하성의 정2품 고문직이다. || ||<(>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 판병부사(判兵部事) ||<(> 좌복야에서 승진. 동~평장사는 정2품 재상직, 판병부사는 국방부 장관이다. || ||<(> [[문하시중]](門下侍中)[* [[정중부]]와 더불어 최고위 문•무관직을 모두 역임한 인물이다.] ||<(> 《고려사》 <[[두경승]] 열전>에만 기록됨.[* 1193년 쯤에 받은 듯한데 특이하게 《고려사》 <명종 세가>에는 나오지 않는다.] || ||<:>'''{{{#white 수직}}}''' ||<(> 수사공(守司空) ||<(> 좌복야와 같이 받음. 수직은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 이의민은 정2품, 사공은 정 1품.] || 1183년 7월 경대승이 병을 앓은 끝에 30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자 권력에 공백이 생겼다. 그러자 명종은 경대승의 위협을 피해 경주로 낙향해 있던 이의민을 불러들여 1184년 2월에 공부상서 직에 임명했는데 이는 무신정변이라는 비정상적 [[쿠데타]]에 의해 옹립된 [[정통성]]이 약한 왕의 정권 보위 차원에서 행해진 일이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경대승의 책임도 분명히 있는데 경대승은 '무신정변 이전으로 나라를 되돌려 놔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했고, 문신들은 이에 동조하거나 아니면 호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허나 무신정변 이전으로 나라를 되돌려야 한다면 당연히 무신들에 의해 왕위에 올라 정통성에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는 명종 입장에서는 경대승과 그 주장에 동조하는 문신들을 마냥 신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이의민이 다시 수도로 돌아오게 되자 곧 이의민의 천하가 열리게 되었고, 벼슬도 수사공 좌복야에 이르렀다. 이후에도 승진에 승진을 거듭하여 1190년 동 중서문하 평장사 판병부사에 제수되었으며, 1194년에는 [[공신]]에 임명되는 영예를 누린다. 그러나 권세를 누리는 것에서 한발 더 나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자신이 왕이 되겠다는 야심이 생긴 이의민은 <[[십팔자위왕]]>을 퍼뜨리며 반란을 일으킬 궁리를 하게 된다. 이 때부터 집에다 [[사당]]을 차려놓고, 경주 일대에서 널리 믿던 [[두두리]]라는 목신(木神)을 밤낮으로 섬겼다고 한다. 이의민은 자신이 최고 실권자였지만 천민 출신이라는 신분적 [[콤플렉스]] 탓인지 항상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무신정권 자체가 피바람으로 얼룩진 정권으로 죽이지 않으면 반드시 자신이 죽는 일종의 [[배틀로얄]] [[서바이벌]] 자체였다.''' 그 난장판 속에서 서로를 죽고 죽이며 그 자리에까지 올라왔으니 말이다. [[사료(역사)|사료]]에 따르면 [[신라부흥운동|신라 부활을 목표]]로 [[김사미·효심의 난]]이 일어났을 때 이의민이 직접 식량과 무기 지원도 했다고 한다. 김사미·효심의 난은 양인들의 농민 전쟁의 성격이 강했지만 혹 자신의 신분에 [[동병상련]]을 느낀 게 아닌가 추측된다. 자기 고향인 경주와 같은 구 [[신라]] 지방에서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이들을 이용해 반역의 초석을 마련했다고 보기도 한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이의민이 죽은 뒤 그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의 진압에 실패한 책임을 이의민에게 뒤집어 씌우기 위한 후대의 조작으로 보기도 한다. 이 시기의 이의민 정권은 [[최충헌]]처럼 이의민 단독으로 정국을 운영할 정도는 결코 아니었고, [[조원정]], [[두경승]]과의 연립 정권의 [[집단지도체제]] 성향을 띄고 있었다. 중간에 [[조원정]], [[석린]]이 두경승과 [[문극겸]]으로부터 [[횡령]] 혐의로 [[탄핵]]당해 군대를 동원하여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진압되어 처형당했으나 두경승은 이의민이 죽는 순간까지도 서로 견제하며 정국을 운영하는 사이였다. 이는 이의민이 절대적 [[독재자]]가 아닌 이의민 정권이 무신들의 집단 [[과두제]]로써 이의민의 권력기반이 상당히 강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데 이의민의 폭주를 염려한 명종의 안전 장치로 풀이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