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임 (문단 편집) === 패기의 개혁가 === 이후 [[홍건적]]의 제1차 침입 때 공을 세우고 2등 공신이 되었다. 홍건적의 제2차 침입때는 개경을 수복하는 공을 세우면서 1등 공신이 되었다. 이때 파견된 이인임의 직책은 서경존무사였고, 당시 총책임자는 수문하시중 [[이암#s-2]](李嵒)이었는데 이암이 [[서경(고려)|서경]] 앞까지 가서 군대의 지휘를 못하던 상황에서[* [[문신]] 출신으로 출격을 하려 하지 않는데다가 군기도 엉망이었다.] 이인임의 숙부인 이승경(李承慶)이 대신 파견되었고, 이인임도 함께 명성이 높아졌다. 이때 숙부인 이승경은 원나라에서 감찰어사를 하며 거듭 승진하다가 모친상을 당해 고려에 귀국한 거물로 [[원나라]]에 가지 않고 2년간 머물러 있던 참이었다. [[홍건적의 난]]을 맞아 인재가 없어 지고 있었던 공민왕은 군무에 익숙한 그에게 부탁해 급히 고려 벼슬을 주고 군대를 지휘해달라고 부탁했다.[* 나중에 이승경은 고려 장수들이 전투를 제대로 하지 않는 것에 울분이 일어 식음을 전폐했고 이 일로 병이 나서 죽는다. 공민왕이 [[재상]]들을 만날 때마다 [[충신]]이라 칭찬하고 슬퍼하며 '충근경절협모위원공신'이라는 공신호를 하사했다.] 이인임은 이때 숙부 이승경을 잃었으나 안우경, 이순, [[최영]], 임견미, [[이성계]] 등과 함께 '경성수복공신' 중 1등 공신이 되었다.[* '경성수복공신'은 개경을 수복해 책봉되었으므로 이후 상당한 군권을 갖게 되나 공민왕은 [[신돈]](辛旽)을 등용해 다수 공신들을 숙청했다.] 이 과정 중에 고려에서는 [[김용(고려)|김용]](金鏞)이 주도한 [[흥왕사의 변]](1363)이 일어나 공민왕이 암살당할뻔 하기도 했으며[* [[노국대장공주]]가 칼을 맞을 뻔한 것도 이때다.] 공민왕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신하들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 이조년의 손자이며 잠시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고국을 위해 싸우다 죽은 충신 이승경의 조카였으며, 무엇보다도 공민왕의 일이라면 어디든지 참여하여 공을 세우던 이인임은 젊어서는 분명 신임받을 수밖에 없는 신하였다. 상황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것이다. 이런 배경하에 이인임보다 일찍이 더 돋보였던 사람은 실은 형인 이인복이었다. 이인복은 백이정에게 배워 [[성리학|주자학]]에 밝았으며 음서로 등용된 동생 이인임과는 달리 [[문과]] 급제, 원나라 제과 급제 등 문신으로서는 누구도 [[태클]]을 걸 수 없는 번듯한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이장경이 중앙 정계에 손을 뻗기 무섭게 그의 아들 이조년 대에 아들 다섯 명이 모두 과거에 급제한 신기록을 가지고 있는 집안이었으므로 장남의 [[엘리트]]적 행보는 경외시되는 것이었다.] 당연히 벼슬로도 승승장구했으며 [[조일신의 난]]을 진압한 뒤에 정당문학 겸 감찰대부, 성산군에까지 봉해지고, 공민왕 대에도 간관을 거쳐 찬성사 겸 공신에 책록되는 등 화려한 이력을 갖게 되었다. 그는 이력부터 사상까지 동생인 이인임과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행보가 비교되었다. 이인복은 공민왕에게 신돈을 멀리하도록 간언하다가 파직되는 등 뜻이 확고하고 할 말은 하는 엄격한 성품의 진정한 보수파였다. 결국 공민왕의 모든 행보에 찬동하는 동생과는 갈등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