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임 (문단 편집) === 군주의 최측근 === 이인임은 공민왕 5년 [[유인우]]와 함께 [[쌍성총관부]]를 함락시키고, 공민왕 12년 [[덕흥군]]의 침입을 막아내는 데 지대한 공로를 세웠다. 공민왕이 신돈을 가까이했을 때는 공민왕의 뜻을 받들어 신돈의 개혁정책에서 실무 책임을 맡았다. [[신돈]]이 '''[[전민변정도감]]'''을 세우고 [[이춘부(고려 후기)|이춘부]], 이인임 등을 정치 일선에 내세워 토지개혁, 노비개혁을 혁신할 때 이인임은 최일선에서 소송과 전제개혁을 담당했다. 당시 고려의 최대 폐단은 토지 소유권의 불안정[* 땅 하나의 주인이 3~8명씩이었다. 그 모두에게 지세를 내야 했다.], 과다한 지세, 양민의 강제 노비화였다. 이때만 해도 이인임은 권문세족이 빼앗은 전민을 주인에게 되돌려주고 노비를 풀어주는 일에 나서고 있었으니 훗날 우왕 시대에 온 고려의 땅을 긁어모은 행보와는 사뭇 '''대조되는 일'''이다. 이때 이인임이 도왔던 신돈의 개혁정치는 [[권문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흔드는 것이었고, 당연히 권문세족의 장남이자 명신인 [[이인복]]은 동생과 크게 반목하게 되었다. 이인복이 이인임을 두고 집안을 망치리라 근심한 것은 사실 이인임이 젊은 마인드로 개혁정치에 참여했을 무렵이었으니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인임은 공민왕의 곁에서 [[북원]]과의 단교, [[행주 기씨]] 일파 숙청, 요동 정벌 등을 추진했으며, 신돈과 함께 이색에게 톡톡히 혜택을 주고 [[성균관]]을 부활시키는 방식으로 [[신진사대부]] 육성을 지원하기도 했다. 해당 시기 책략의 기조는 모두 고려의 자주성 회복과 이어져 있었다. 고려의 군주는 친모가 [[원나라]]에서 어떤 입지의 공주이냐에 따라 그 대우가 크게 갈렸는데, 예컨대 세조 [[쿠빌라이 칸]]의 막내딸인 [[제국대장공주]]의 몸에서 난 [[충선왕]](제26대)은 원나라 내에서도 중요한 황실 인척으로 대우받았고, 대대로 고려 국왕보다도 [[심왕]]이 원나라 내에서는 더 정치적인 입지가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민왕은 선왕 [[충숙왕]](제27대)의 3남인데다가 고려인 출신 제4비인 [[공원왕후 홍씨]][* [[몽골인]]인 [[복국장공주]], [[조국장공주]], [[경화공주]]가 충숙왕과 계속 혼인하는 동안, 내내 서열이 밀려 제4비까지 갔다.]의 아들이었다. 당장 동복형인 [[충혜왕]](제28대)의 사례만 보더라도 30세 나이에 끌려가 죽기까지 [[원나라]]의 손에 의해 압송, 투옥, 폐위, 복위, 폐위, 귀양, 의문의 죽음까지 온갖 일을 두루 겪었다.[* 물론 [[충혜왕]]은 막장왕이긴 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공민왕은 원나라의 쇠락을 믿고 [[병신정변]] 등 위험한 줄다기리를 이어나갔는데,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기존 질서를 부수는 데 동참할 반골적인 신하들이 필요했다. 공민왕이 군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고, 심지어 개혁정치까지 해나간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으며, 이 당시의 결단은 어느 것이든 모두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 따라서 [[이제현]], [[류탁]], [[신돈]], [[이색(고려)|이색]], 이인임 등으로 이어지는 인재 기용 방식은 계속해서 정치적인 시험의 일환이자 일종의 도박이었다. 공민왕은 유학자, 승려 등 기존 세력과 관계가 없는 개혁세력에게 번갈아 칼자루를 쥐어주면서 시험하기를 반복했는데, 의심이 들면 숙청을 서슴치 않았다. 이 과정에서 끝까지 남은 자는 권문세족 출신임에도 공민왕의 충복으로 나섰던 수완가 이인임뿐이었다. 또한 이인임은 공민왕의 무리한 토목공사에 반대했던 [[류탁]]의 처벌을 둘러싸고 군주와 신하들 사이에 극심한 대립이 벌어졌을 때, [[이색(고려)|이색]]을 국문하라는 왕명을 받았으나, 옥에 갇힌 사대부들의 유종 이색을 국문하는 대신 이색의 진심을 군주에게 잘 전달함으로써 사태를 진정시켰다. 이색과는 왕권 강화를 위해 정치적으로 상호 협력 관계를 유지했다. 또한 그는 신돈이 [[일본]] 사신을 소홀하게 대접하자 개인 비용으로 사신을 접대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고 예리한 수완 또한 갖춘 자였다. [[제1차 요동정벌]] 당시 총사령관의 직위에 있으면서 [[이성계]], [[임견미]] 등과 잠시나마 요동을 정벌하는 데 성공하기도 했으며, 결국 좌시중을 거쳐 수문하시중에까지 오른다. 공민왕 생전 그는 공민왕이 '''[[북원]]과의 관계를 단절'''하려하는 순간에는 서북면도통사로 원나라 동녕부를 토벌했고, '''신돈의 개혁정치''' 시절에는 백성들에게 땅을 돌려주는데 앞장서는 등 공민왕의 위험한 결단에도 늘 목숨을 내놓고 함께 했는데, 심지어 '''영전 건축''' 등 공민왕의 독선적이고 다소 그릇된 결단에도 반대하기보다는 찬성했다. 이 행보는 나라의 충신보다는 '''[[군주|한 사람]]'''의 심복다운 것이었고, [[국가]]의 신하라기보다는 단지 왕의 사람에 가까운 인생을 살아왔던 그였으므로 당연히 공민왕이 없어진 후, 이인임의 행보는 망가질 수밖에 없었다.[* 심복 정치는 원간섭기 부터 시작된 고려왕의 정치행태였고 이를 폐행이라 불리었다. 그리고 이런 폐행은 왕이 죽으면 후계자의 심복으로 대체되는 형태로 이어졌다. 이인임은 우왕이 어리다는점을 이용해서 숙청을 피하고 권신으로 변신한것이다. 한편 공민왕의 본래 폐행이라고 할만한 정세운, 조일신, 김용은 공민왕에 의해 숙청당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