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임 (문단 편집) === [[공민왕]]의 죽음, 그리고 [[흑화]] === 결국 공민왕 시해 이후 이인임은 '''[[권신]]'''으로 변모한다. 공민왕으로부터 어린 [[우왕]]을 부탁받았음을 내세우며[* 그야말로 공민왕의 측근에서 산전수전 다 함께 헤쳐온 넘버원 신하였기 때문에 당연히 설득력을 가졌다.], 공민왕 사후 시해사건을 밝혀내고 [[공원왕후 홍씨]]와 [[경복흥]](慶復興)의 반대를 물리치고 우왕을 옹립하는데 성공하면서 권력의 중심에 서게 된다. 일각에서는 이 과정이 석연찮다는 견해도 있다. 이인임이 [[홍륜]](洪倫)과 같은 명문세가 출신 자제위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설이다. 익비 한씨가 홍륜이 아니라 정말 공민왕의 아이를 임신했다면 신돈과 연관된 [[우왕|모니노]]와 후견인인 이인임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수도 있었으므로, 이인임이 시해의 배후였다는 주장이다.[* 다만 익비 한씨는 딸을 낳았다.] 물론 철저히 야사로서 이인임이 혼자 일을 도모하고도 그때까지의 지위를 누리기엔 당시 고려 조정엔 쟁쟁한 명사가 많았고, 익비 한씨의 아이가 홍륜의 아이라는 확신이 없었다면 공민왕이 황급히 홍륜을 살해하려 들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흥미로운 지점은 《[[명사(역사책)|명사]]》 <조선 열전>에서 이인인(李仁人, 이인임의 오기로 보임)이 공민왕을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 착안하여 드라마 <[[정도전(드라마)|정도전]]>에서는 이인임이 자제위를 충동질하여 공민왕을 차도살인했다는 과감한 각색을 보이고 있다.] 즉위할 당시 우왕은 10세였기 때문에 공원왕후 홍씨가 섭정을 맡았지만 공원왕후는 공민왕의 유지라는 강력한 명분을 가진 이인임을 물리치지 않고는 무엇도 할 수 없었고, 공원왕후가 1380년에 사망한 후로는 우왕이 1386년에 이인임이 사직하기 전까지 거의 이인임에게 정권을 맡기다시피 했기 때문에 우왕은 거의 10년 가까이 사실상 '''이인임의 섭정'''을 받게 되었다.[* 이인임이 섭정승으로 별도 품계를 받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조선시대에 들어 우왕을 '신우'로 기록하고, <반역 열전>에 수록하던 당시, 이인임의 섭정 전개를 더욱 강조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명의 신하가 10년 이상 섭정 행위로 국무를 관장하고, 심지어 왕의 양부로 대접되었다는 것은 한국 역사상 그 유례가 드문 일이다. 이인임이 이런 전략을 사용한 것은, 공민왕 즉위시의 전례 때문이었다. 강릉대군이 공민왕으로 즉위하던 당시에도 유사한 사례가 있었는데 바로 [[이제현]](李齊賢)의 예다. 공민왕은 즉위 직후 60대였던 성리학자 이제현[* [[이색(고려)|이색]]의 스승이다.]을 섭정승으로 두려는 뜻을 보였다. 이제현을 권단정동성사로 두며 섭정으로 내세운 것은 지위가 약한 상태에서 공민왕이 자연스럽게 국정을 장악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이제현은 당시 도첨의정승으로 오르며 국정을 총괄하였고, 후엔 김해후로 봉해진 바 있으며, 앞서 언급한 이인임의 형, 이인복의 절친한 벗이기도 했다. 다만 이제현은 압도적인 지위까지 오르지만 공민왕의 뜻으로 1년만에 자리에서 물러난다.[* 보통 신하가 비공식적 섭정승을 맡는 경우는 전례상 길어도 3개월을 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인임은 공민왕 때의 방식을 그대로 따라, 우왕의 즉위기에 비슷한 행보로 섭정을 시작하였으며, 광평부원군(廣平府院君)으로 봉해지기까지 도당을 장악하는 방식도 비슷했다. 이제현의 사례와 차이가 있다면, 그는 절대로 권력을 내려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종국엔 그 권력을 자신을 위해 사용했다는 점이다. 우왕 시기에 이인임은 명, 원과의 외교문제에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면서 동시에 [[북원]]에서 보내온 사신을 맞이하려는 '''이중 외교''' 정책을 추진했다. 이인임이 우왕의 즉위를 북원의 중서성에 보고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북원과의 외교가 꼬이면서 시작된 일이었다. 고려 조정의 일부 세력이 북원에 가서 고려 국왕이 죽었는데 아들이 없다는 거짓 보고를 올린 것이다. 직후 북원은 제2대 [[심왕]](瀋王) [[왕고(고려)|왕고]](王暠)의 손자인 제3대 심왕 [[왕토크토아부카]](王脫脫不花)를 고려 국왕으로 임명하겠다고 선포해 왔다. 심왕이 어떤 자리인가, 대대로 고려 본국을 괴롭히며 정쟁을 일으키기 위한 자리로 활용되어 온 것이 바로 그 심왕이었다.[* 고려의 왕들은 늘 원나라의 제후인 심왕에 의해 견제받아왔고, 선대왕인 [[충선왕]]의 예를 보더라도 심왕을 겸하자 고려 국왕의 자리보다 심왕의 자리를 더 중하게 여겼을 정도로 심왕의 힘이 더 컸다.] 다만 북원은 만약 공민왕에게 아들이 있다면 꼭 왕토크토아부카를 고려 국왕으로 책봉할 필요는 없다고 양보책을 내놓았다. 아무리 북원과 단교하고 친명을 시작했다곤 하나, 이로 인해 북원이 고려의 왕을 둘로 만드는 상황이 온다면 고려 왕의 지위는 크게 위협받을 것이었다. 또한 아무리 원나라가 쇠퇴기를 맞이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건재했으며, 이제 막 등극한 10세의 우왕을 데리고 죽기로 맞설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당장 친명의 효과를 보고 있는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면 그 또한 아니었다. 이때의 명나라 태조 [[홍무제]] 주원장은 매년 말 100필, 금 100근, 은 10,000냥, 세포 10,000필 등을 요구하며 강짜를 부릴 뿐 실질적으로 도움을 줄 만한 관계도 아니었다. 결국 이인임은 변절의 신호를 보낸다. 도당의 의견이 북원에 우왕의 즉위를 알려주어야 한다는 쪽으로 수렴되고 만 것이다. 즉위한지 얼마 되지 않은 우왕의 정통성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문제는 그 방식이었다. 백관의 서명을 받아 우왕의 즉위를 북원에도 알리겠다는 이인임, 경복흥, 최영 등 보수파와 군부의 의견은 정도전 등 친명파들의 극력 반대에 부딪치게 된다. 친명파들은 북원의 사신을 맞아들이는 것조차 반대하였고, 곧 목숨을 걸고 반대하고 나섰다. [[정도전]]과 [[정몽주]]는 박상용, [[권근]], 김구용 등 10여 명과 상소하고 대간들은 이인임을 [[탄핵]]했다. 이때 [[신진사대부]]는 종국에는 그 정책을 추진한 이인임을 죽이라고 주장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인임과 정면충돌한 [[정몽주]]의 정치적 행동은 철저한 좌절로 끝나고 만다. [[박상충]][* 조선 태종의 측근 [[박은]]의 아버지.] 등이 옥고를 겪은 뒤 귀양 도중 장독이 올라 죽고 그외 정몽주, 정도전을 비롯한 21명의 [[사대부]]들이 죽거나 [[유배]]당하였다. 특히 이때 [[최영]]은 전록생과 박상충을 참혹하게 곤장치며 문초하였다. 당시 이인임이 말하기를 >"이 자들을 죽일 것은 없다" 라고 했으며, 이어 그들을 귀양보냈던 바 모두 도중에서 죽었다. 이후 이인임은 반대파를 계속해서 숙청해나갔다. 전천길의 고발을 이유로 흥왕사의 변때 출세한 무장 양백연과 그 당여들을 숙청했고, 우왕이 15세 전후로 믿고 아끼던 유모 장씨를 중심으로 하여 측근세력을 육성하고, 지윤을 후원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 또한 숙청했다.[* 이때 과거 이인임과 같은 신돈의 당여였던 목인길이란 자는 지윤과 공모해 이인임을 제거하려다가 마음이 바뀌어 이인임에게 밀고해 살아났다. 그러나 이인임은 이 일을 잊지 않고 기억했다가 지윤을 제거한 후 트집을 잡아 목인길을 무고해 정계에서 축출한다. 목인길은 이후에도 또 탄핵을 줄기차게 당해 끝내 유배되었고 조선이 건국할 때까지 살아있었고 그덕에 해배돼 생을 마친다. 그는 이인임 또래였는데 역으로 정계에 발을 못붙인 덕에 천수를 누릴 수 있었던 셈이다.]이인임은 우왕의 유모 장씨, 장씨와 통정하던 지윤 등이 자신을 제거하려 하는 것을 사전에 알아채고, [[최영]]을 비롯 경복흥과 조정 중신들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좌절시켰다.[* 공민왕 시기를 거치며 조정의 명망있거나 유능한 대신들이 혼란기 속에 제명에 못살고 죽거나 의심이 많은 공민왕에게 숙청당해 그 공백을 노리고 이인임이 쉽게 권력을 장악한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섭정을 맡은 명덕태후는 의지할 것은 혈족 밖에 없다 생각했는지 살아남은 자신의 인척들 위주로 정국을 꾸려나갔었다. 대표적으로 김속명이 있는데 태후의 먼 인척으로 공민왕에게 신돈을 소개해준 김원명의 동생이다. 어떻게 보면 낙하산 인사일 수도 있지만 왜적을 상대로 그럭저럭 군공도 있었고 젊어서 감찰 업무를 도맡으며 군권을 쥔 최영을 상대로 기죽지 않고 탄핵한 꼬장꼬장한 위인으로 직설적인 성격에 쓴소리를 잘해 적들이 많았다. 형 김원명이 신돈에게 밉보여 숙청당했지만 어찌저찌 목숨을 보전해 우왕 즉위 후에는 경복흥과 함께 태후의 비호를 받아 조정의 원로이자 미스터 쓴소리, 대쪽으로 행동하며 이인임 일파도 눈치를 볼 정도였다. 그러다가 우왕의 친모 반야와 관련된 일로 우왕과 이인임에 찍혀 유배를 갔다가 10년 뒤 유배지에서 사망했다. ] 지윤과 그 일족은 물론 유모 장씨까지 모조리 처형되었고, 이후 우왕은 정서적으로 [[고아|의존할 곳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이전까지는 우왕도 공원왕후 홍씨의 말을 듣고 경연을 여는 등 친정할 때 바른 치세를 하려고 노력할 기미를 보였으나, 이후로는 완전히 포기해버려서 [[명덕태후|공원왕후]]의 사망 이후에는 오직 이인임에게만 의지하게 된다. 우왕은 이인임의 고종사촌 [[이림(고려)|이림]]의 딸과 혼인한 뒤 그녀([[근비 이씨]])와의 사이에서 [[창왕]]을 낳았고, 종종 이인임의 사저에 들러 연회를 즐겼으며 이인임을 아버지, 이인임의 처를 어머니라 부르며 절을 했다. 결국 우왕은 신하인 이인임을 양아버지처럼 여겨 사실상 통치를 맡긴 걸 넘어 사적인 부분으로도 의지하는 등 왕으로서 위태로운 행보를 보이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