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인임 (문단 편집) === [[종계변무]] 사건 === [[위화도 회군]] 이후, 공양왕이 즉위하자 [[이성계]]와는 정적 관계이던 윤이와 이초는 명나라에 건너가 이성계를 무고했다. 공양왕은 종실이 아니라 이성계의 인친이며, [[공양왕]]과 이성계가 장차 군사를 일으켜 명나라를 공격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어 이를 반대하던 이색, 조민수, [[이림(고려)|이림]], 변안열 등 고려의 재상 19인이 살해 또는 유배될 것이라면서 이를 토벌해 주기를 요청했다.[* 단순히 윤이와 이초의 개인적인 책동에서 비롯된 사건이 아니라, 공양왕 즉위 이후 정권에서 소외당한 이색 등 이성계에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 무고가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이 사건은 당시에는 오히려 이성계 일파가 조선 개국에 반대할 만한 사람을 모조리 역모죄로 몰아 가두고 죽이는 것에 이용되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한바탕 논란이 일었으나, 이성계가 오히려 요동을 정벌하려던 왕에게 반기를 들고 회군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오히려 윤이와 이초를 의심했고, 무고임을 밝혀 귀양보냈다.] 이때 한 가지 문제가 생기는데, 윤이와 이초가 '''이성계의 가계에 관해 고려의 [[권신]] 이인임의 후손이라고 말을 해버린 것이다'''. 명나라는 이 이야기를 믿고, 그 내용을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에 그대로 기록했다. 조선에서 이러한 종계의 기록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태조 3년이 되어서였다. 조선 태조에 관한 종계오기는 표면적으로 명나라와는 무관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건국 직후의 조선으로서는 왕통의 합법성이나 왕권 확립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종계 문제를 계기로 이성계를 무시하고 의심했다. 뿐만 아니라, 종계오기를 빌미로 조선을 복속시키려고까지 했다. 더구나 이인임은 우왕 때의 [[권신]]으로 이성계의 정적이었다. 그런데 이성계가 그의 후사라는 것은 가장 모욕적인 말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그리하여 이 문제는 이후 양국간에 매우 심각한 외교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조선측에서는 명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길에 변명의 글을 지어 사실의 잘못된 점을 지적해 보냈다. 그 안에는 태조 이성계의 가계 22대를 간략하게 기록했고, 태조 즉위의 정당한 이유에 대해 밝히면서, 이인임의 불법적인 행위를 상세히 알리는 내용이 실렸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태종 때 다시 한 번 주청문을 보내는데 또 한 번 태조의 가계를 자세히 기록하였다. 그리고 태조가 이인임과 같은 이씨가 아님을 밝히기 위해 이인임의 가계까지 상세하게 기록해 추가로 보냈다.[* 이것이 문제가 된 것은 중국에는 우리의 '본관' 개념이 없어서였다. 즉 우리는 덕수 이씨, 전주 이씨 같은 식으로 같은 이씨에서도 나눠서 부르지만 중국에서는 그냥 다 같은 이씨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명나라에서는 명 태조 주원장의 유훈이 《대명회전》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력회전》 중수본에서 변명 사실을 부기하는데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명나라의 입장에서도 태조 주원장의 유훈이 기록된 《대명회전》을 고작 소국의 요청 때문에 뜯어 고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하여 종계변무는 이후 근 200년간이나 양국 관계에서 외교 문제가 되었고, 이 문제 때문에 조선에서는 근 200년 가까이 끊임없이 이를 고쳐달라고 명나라에 요구하고, 명나라는 [[안 돼 안 바꿔줘 바꿀 생각 없어 빨리 돌아가|안 된다고 거절하는 일]]이 끊임없이 반복되었는데 이를 '''[[종계변무]] 사건'''이라고 한다. 이것이 완전히 해결을 보게 된 건 제14대 [[선조(조선)|선조]]대인 1584년에 이르러서였다. 그것도 《명 태조실록》은 태조 홍무제의 업적을 기록한 책이라 함부로 못 고치니 끝내는 《대명회전》만 고친 것이다. 200년간이나 골머리를 썩여 온 문제라 선조는 개정판을 명나라에서 가져오라고 명했고, 마침내 1588년 개정된 《대명회전》이 조선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한 사신단은 전원 공신이 되었다. 이후 [[청나라]] 때 《대청회전》을 편찬할 때도 같은 문제가 있었고[* 이는 제21대 영조때 일이다. 여기서 문제가 된 것은 청나라가 《대명회전》을 참고하기로 한 것인데 문제는 이게 개정판을 참조할 것인지 원판을 참조할 것인지였다. 원판을 참조하면 또 종계변무 문제로 골치를 썩일게 뻔하니 조선에서는 필사적으로 개정판을 참조하게 만들려고 하여 어마어마한 뇌물을 먹였고, 결국 개정판을 참고하기로 결론이 났다.] 그 이후에도 다른 기록이 발견되어 이를 수정하는 해프닝이 일어나기도 했다. 자그마치 제25대 [[철종(조선)|철종]]때 일이었다.[* 이건 사실 웃픈 일인데 이것이 기록된 서적은 청나라에서도 듣보잡이었기에 수정하러 온 사신들에게 "그런 게 있었나?" 하는 반응이었다.] 더 상세한 사건 경과는 해당 문서 참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