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자성 (문단 편집) == 평가 == [[파일:external/apps2.bdimg.com/901d5dae6c3bf9c30d3ebcd4ce4725be.jpg]] 베이징 교외의 이자성 동상 중국 역사에서 등장하는 수많은 반란수령들 중에서 가장 인기가 높다. 한국, 일본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중국에서는 영웅으로 숭배되는 인물이다. [[중국 공산당]]이 이자성의 난을 높이 평가하기 이전부터 이자성은 농민 출신 영웅, 한족민족주의의 상징으로 평가받았다. 대만, 홍콩에서도 이자성이 주인공이 된 드라마-영화가 나올 정도였다. 중국에서는 이자성과 그의 군대인 대순군에 대한 전래설화가 상당히 많다. 틈왕(闖王)이라는 칭호도 "관제"로 불린 [[관우]]나, "악왕"이라로 불린 [[악비]]와 마찬가지로 민중이 그를 영웅시하는 호칭인 것이다. 다만 실제 사후 황제로 추숭된 관우와 왕으로 추증된 악비와 달리 틈왕이라는 호칭은 별명에 가깝다. 농민 출신에서 황제까지의 자수성가한 인물이라는 점이 인기의 주 요소 중 하나인데, 이런 점을 보면 명나라의 창업 군주인 주원장과 비슷하다. 망해가던 명나라를 끝장낸 성공한 반란군 지도자라는 점, 얼마 안되어 만주족의 나라인 청나라에게 패해 최후를 맞았다는 비극적인 행적도 인기에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상대적으로 가까운 시기의 인물이라는 점도 있다. [[만주족]]의 국가인 [[청나라]]에 반감을 가진 한족 민족주의, 청나라 관점의 프로파간다에 영향을 받은 [[명나라]]에 대한 비하 의식, 그리고 부패한 명나라에 대항해서 새나라를 만들어보자는 농민반란을 일으켰던 영웅으로, 마치 [[전봉준]] 같은 인물로 높이 평가된 것이다. 같은 단명 왕조인 [[신나라]]의 시조인 [[왕망]]과는 다른 평가. 더욱이 대륙에서는 [[중국 공산당]] 집권 이후 민중사관에 따라 농민반란이 대부분 높이 평가되었는데, 이자성은 [[홍승주]]의 관군에 괴멸적인 타격을 입고 고작 7명만이 남아 산속으로 도주했으며, 마오도 [[장제스]]에게 큰 타격을 입고 고난의 행군, 장정을 해야 했다. 또한 이자성의 거점은 섬서성이었으며, 마오의 홍군도 섬서성 연안에 자리잡았다. 이자성이 홍승주군이 숭정제의 명으로 요동으로 이동한 사이 부활한 것처럼 마오도 [[시안 사건]]으로 한숨 돌린후 농촌지역으로 파고들어 세력을 확장했다. 게다가 이자성군의 부대는 홍군의 [[삼대기율 팔항주의]]와 비슷하게 민폐를 못끼치게 하는 규율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계 일본인 역사가 [[진순신]]은 이점을 이자성의 성공요인으로 보았다. 중국공산당 및 마오쩌둥 입장에서는 절로 이자성에게 동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국민당군이 일본과 싸우는 도중 세력 기르다 뒷통수 친 마오가 명이 청과 싸우고 있는데 세력 키워서 뒷통수 친 이자성에게 동질감을 느꼈을듯] 그러나 북경에 입성한 이후의 행적에 대하여는 부정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훗날 본인들이 베이징에 입성할 때 "우리는 절대 이자성이 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현대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자인 [[마오쩌둥]]도 이자성을 존경했고, 본인의 재산으로 거액의 인세를 선불하여 소설가 야오쉐친으로 하여금 대하소설 '이자성'을 집필하게 했었다. 이자성은 농민 출신에서 황제까지의 자수성가와 중국 한족의 민족주의를 만족시켜준다는 점에서 인기가 많다. 그러나 이자성에 관한 자료는 명청 교체기의 혼란 탓에 기록이 제대로 남지 못하여 신화화되고 윤색된 측면이 강하다는 것도 부정하긴 어렵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