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재명(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생애 == 1887년 10월 16일 [[평안도]] [[선천군]](현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평안남도]] [[평양부]] 시내로 이주하여 본적을 두었다. 그러다가 1904년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을 갔으나 1907년 귀국하였다. 1909년 1월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가 [[순종(대한제국)|순종]]과 함께 평양부를 방문하기로 하였을 때 [[암살]]을 계획하였으나 [[안창호]]의 만류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국 [[이토 히로부미]]는 같은 해인 1909년 [[안중근]] 의사에 의해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저격당해 죽었다.]] 이재명 의사가 의거를 하지 않았어도 결국 그 해에 죽을 [[운명]]이었다.] 《[[백범일지]]》에 이재명의 의거에 관한 내용이 비교적 자세히 나와 있다. [[김구]]가 [[황해도]] [[재령군]]에 있었을 때 "이재명이라는 자가 [[총]]을 쏘며 난리를 피우면서 아내를 죽이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만났는데 김구와 [[노백린]][* 당시 김구와 함께 [[황해도]] [[재령군]]에 있었던 [[독립운동가]].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유학간 뒤 [[조선]]에 돌아와 육군의 요직에 올랐다. 그 뒤 [[을사조약]]에 반대하였고 국권이 침탈되어 [[대한제국 군대 해산|군대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독립운동]]과 계몽운동에 참여하였다. 뒤에 [[중국]]으로 [[망명]]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독립군]] 육성에 관여하였다.]은 이재명이 단순히 자기 말을 안 듣는 아내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고 그의 총을 빼앗아 [[기차]]를 타고 가 버렸는데 의거 이후 그것이 이완용을 척살하기 위한 [[무기]]였음을 알고 크게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사실 말하자면 이재명이 자신이 이완용을 죽이겠다 하자 그의 아내는 만류하였고 이재명은 "이 계집이 [[나라]]가 중한 것을 모른다"고 화를 낸 것. 그리고 나서 나중에 이완용이 [[칼빵]]을 당하고도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후회했다는 말이 있다. 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있다. 김구와 노백린은 이완용을 죽이는 데 사용할 무기임을 알고는 있었는데, 이재명을 헛된 열정에 들뜬 젊은이로 보고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며 말린 것이라고도 한다. 1909년 [[만주]]의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의 저격으로 죽자 [[이완용]]·[[이용구]]·[[송병준]]을 처단하기로 하였는데 이완용은 이재명, 이용구는 김정익, 송병준은 [[이동수]]가 담당하여 죽이기로 결정했다. 1909년 12월 22일 서울 종현 [[천주교]]회당(오늘날 [[명동성당]])에서 이완용이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 2세]][* [[한국]]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으나, 대신(?) 수많은 사람들을 살육하며 [[세계사]]에 남을 만한 폭정을 저지른 [[폭군]]이자 베를린 회담 때 [[콩고]]를 받으려고 [[영국]]과 [[프랑스]]에 딸랑딸랑거리던 야비한 소인배였다. 당시 레오폴드 2세가 지배하였던 [[콩고 독립국]]에서 [[나치 독일]] 저리가라 수준의 [[인종차별]]적인 폭정과 잔학행위를 일삼는 바람에 같은 [[제국주의]] 국가들로부터도 비난받을 정도였다.]의 추도식에 참석하였다. 이재명은 [[신문]]을 보고 이 정보를 입수한 뒤 밖에서 [[군밤]] 장수로 변장하고 있다가 11시 30분에 [[인력거]]를 타고 지나가려는 이완용의 [[허리]]와 [[어깨]]를 [[칼]]로 3번 찔렀다. 이 과정에서 이완용과 이재명 사이를 막아섰던 인력거꾼 [[박원문]]이 칼에 찔려 [[사망]]하였고, 부상당한 이완용은 대한의원[* 현재 [[서울대학교병원]] 의학[[박물관]].]에서 당시로서는 최고 수준의 [[치료]]와 대[[수술]]을 받은 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게 한국의 [[흉부외과]] 수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296&aid=0000001314|제1호]]이다. 이때 이완용을 치료한 일본인 [[의사]]가 말하기를 "[[외과]] 의술의 발전이 10년만 늦었어도 이완용은 이 날 죽었다." || [[파일:1B3AH.jpg|width=300]] || || ▲ [[명동성당]] 앞에 있는 의거비[* 벨기에 황제라고 나와 있으나 레오폴드 2세는 황제가 아니고 왕이었다.] || >● "내 목숨 빼앗을 수 있으나 충혼은 못 빼앗아" >경시청에서 조사를 받은 의사는 [[일본 경찰]]이 "공범이 있느냐?"고 묻자 "이러한 큰일을 하는데 무슨 공범이 필요하냐. 공범이 있다면 2,000만 우리 동포가 모두 나의 공범이다."고 말했다. > >이듬해 4월 열린 재판에서도 "도와준 자를 말하라"는 일본인 재판장 스가하라에게 "[[이완용]]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자는 우리 2,000만 동포 모두며, 방조자는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그리고 엄숙한 목소리로 역적 이완용의 8개 죄목을 거론하며 통렬하게 비판했다. > >"공평치 못한 법률로 내 목숨을 빼앗을 수는 있으나 나의 충혼, 의혼(義魂)은 절대 빼앗지 못할 것이다. 한번 죽음은 슬프지 않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일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내 결코 죽어서 그 원한을 갚을 것이다." > >의사는 1910년 5월 18일 경성지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 의사는 사형 선고를 받고 꼿꼿한 자세로 재판장을 꾸짖으며 이렇게 최후 진술을 했다. 부인 오씨는 '국적 [[이완용]]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았는데 우리 가부(家夫)는 왜 사형에 처하느냐'며 눈물을 흘렸다. > >의사는 [[조선총독부]] 체제 발족 바로 전날인 1910년 9월 30일 순국했다. 의사는 "의거를 공모한 사람들은 아무 관련이 없다"고 보호하면서 끝까지 단독 범행임을 주장했다. 그러나 김병록 등 동지 10여 명도 최고 징역 15년형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 >손성진의 『우리가 잘 모르는 독립운동가』 Ⅱ - ▣이재명▣ 이때 [[교수형]]을 선고받은 그는 곧 공소하였으나 1910년 7월 12일 경성공소원에서 소위 [[모살]]미수, [[고살]]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23&evntId=0034970584&evntdowngbn=Y&indpnId=0000003033&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공소가 기각되었으며,]] 이에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5일 고등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https://theme.archives.go.kr/next/indy/viewIndyDetail.do?archiveId=0001352023&evntId=0034970593&evntdowngbn=Y&indpnId=0000003042&actionType=det&flag=1&search_region=|상고가 기각되어]] [[교수형]]이 확정되었다. 그리고 [[경술국치]]로 국권을 빼앗긴 지 1개월만인 1910년 9월 30일, 결국 [[서대문형무소|경성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어 [[순국]]했다. 이 때 순국 직전에 '''"나는 죽어 수십만 명의 이재명으로 [[환생]]하여 기어이 [[일본]]을 망하게 하고 말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여담으로 비록 이재명 의사가 이완용을 그 자리에서 죽이는 데는 [[실패]]했지만, 이완용은 이때 입은 상처 때문에 17년간 [[폐렴]]을 고질병으로 달고 다니며 고생하다가 결국 1926년에 그로 인해 죽었다. 어찌 보면 17년에 걸친 암살. 근데 이완용은 [[을사오적]] 중에서는 오래 산 편이다.[* 죽은 시점상 [[이완용]]은 을사오적 중 3번째로 죽었지만, 4번째 사망자인 이지용이 이완용보다 훨씬 어렸기에 이완용이 죽은 지 2년 뒤에 이지용이 죽었음에도 나이가 어려서 실제로는 이완용이 2번째로 오래 살았다. [[을사오적]] 중 3명은 큰 테러도 안 당하고 권세를 누렸는데도 그냥 병으로 죄다 50대에 죽었다([[박제순]]은 마음의 병으로 외부활동을 삼갔던 부분이 있었기에 권세를 누렸다 보지 않는 시각도 있다). 60대 후반에 죽은 이완용은 당시 기준으로 어느 정도 장수한 것이며 피습 경력과 후유증까지 고려하면 천수를 누렸다고 할 만큼의 장수다. 물론 을사오적 중 --꼴밉상의 제왕-- [[권중현]]처럼 아예 천수를 누린 수준을 넘어 천수보다 더 살아서 팔순을 넘겨 독보적으로 장수한 어이없는 케이스도 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에 그를 기리는 무후선열 위패가 세워졌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