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재형(정치인) (문단 편집) == 생애 == [[1914년]] [[11월 7일]], [[경기도]] [[시흥군]] 남면 [[산본동|산본리]](현 [[군포시]] [[산본동]])에서 아버지 성재(省齋) 이규응(李奎應, 1882. 9. 1 ~ 1948. 8. 15)[* 자는 성오(成五).]과 어머니 [[남원 양씨]](南原 梁氏) 양남옥(梁南玉, 1886. 7. 10 ~ 1962. 11. 4)[* 양승환(梁升煥)의 딸이다.] 사이에서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규응은 [[조선]] [[선조(조선)|선조]]의 서7남 [[인성군]]의 10대 종주이자 9대 종손(宗孫)[* 다음은 이하 출처 사진이다. [[파일:이규응 이재형 부자 족보.png]]]으로, 1919년부터 1927년까지 시흥군 남면 면장을 지냈다. 이재형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후대 종손이 되었다.[* 덕흥대원군 기준 12세손 '재(載)' 항렬. '''[[헌종(조선)|헌종]], [[고종(대한제국)|고종]]의 동생 뻘이다.'''(흥선대원군의 이름 이하'''응''' - 고종의 초명 이'''재'''황.) 여담으로 조선 후기로 갈수록 조선 왕실의 직계 혈통이 헌종 대에 단절되고 손이 귀해지면서 왕실과 같은 혈통인 덕흥대원군파,특히 봉사손들은 사실상 종친이나 진배없는 수준의 예우를 받았다고 한다.[* 선조가 명종의 이복형인 [[덕흥대원군]]의 3남이며 순회세자가 요절하여 후사가 없던 명종의 후계자로 낙점되어 왕위를 계승했다. 이 때문에 선조 이후의 조선 국왕들은 모두 덕흥대원군파의 일원이다.]따라서 헌종, 철종과는 17촌, 18촌으로 사실상 남이나 다름없던 고종이 왕이 될 수 있던 것도 할아버지인 남연군이 덕흥대원군파의 일족으로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신군의 양자로 입적되었기 때문이다.] [[경기고등학교|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재학 중이던 1932년 1월 20일 최영철(崔英澈)의 권유로 같은 학교 학우 김춘희(金春熙)가 책임자로 있던 독서회에 김은환(金誾煥)·손우현(孫禹鉉)과 함께 가입했고, 이후 매주 금요일 방과 후에 [[공산주의]]를 연구하는 정기 모임을 가졌다. 그러나 1932년 2월 20일 최영철이 검거되면서 조직이 발각되었고, 이재형 또한 [[서울종로경찰서|경성부 종로경찰서]]를 거쳐 경성지방법원 검사국에 송치되었다. 1932년 7월 30일 직접적인 공산주의 활동을 벌인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기소유예]]로 [[불기소처분]]이 [[http://db.history.go.kr/id/gsdc_002_0700|내려졌으나]] 학교 당국으로부터 퇴학당했다. 이후 [[배재고등학교|배재고등보통학교]]([[https://paichai.hs.kr/baejae_intro/award_winners.php|49회]])로 편입하여 1934년 졸업했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주오대학]] [[대학 전문부|전문부]] [[법학과|법과]]에 입학해 1938년 졸업하였다. 귀국 후에는 안양금융조합 이사를 지냈고, [[8.15 광복]] 후에는 조선금융조합연합회 사업부장 및 고문 등을 지냈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기도 시흥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한국민당]] 후보로 경기도 시흥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제2대 국회의원]] 임기 중이던 1952년 11월 6일부터 1953년 10월 7일까지 [[https://www.motie.go.kr/motie/mi/mr/ministerhistory/historyminister/historyMinisterUser/historyMinisterList.do?dir_div=Minister|제5대]] [[산업통상자원부장관|상공부장관]]을 역임했는데, 이때 당시 [[이범석]]계와 연관이 있는 족청파(族靑派)로 지목받기도 하였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기도 시흥군 선거구에 출마했으나 얼마 뒤 후보직을 사퇴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경기도 시흥군 선거구에 출마해 현직 지역구 국회의원이던 무소속 [[이영섭(정치인)|이영섭]]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제4대 국회]] 말기이던 1960년 [[대한민국 국회부의장|국회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같은 해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 후보로 경기도 시흥군 선거구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1967년)|신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1968년 신민당 부총재가 되었다.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대중]]을 지지했다.[* 물론 경선 2차 투표의 캐스팅보터는 [[이철승]]이었지만, 이런 배경이 없었다면 김대중 의원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 어려웠을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신민당 대통령 후보가 된 [[김대중]]과의 대선 중 갈등으로 신민당을 탈당하여 군소정당 [[국민당(1971년)|국민당]]에 몸담았다가,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정계를 떠나 고향인 시흥군 남면 산본리의 농장에서 소일하면서 [[제헌동지회]] 회장을 지냈다. 1981년 돌연 [[민주정의당]] 창당발기인으로 정계에 복귀했다[* 이때 [[이종찬(1936)|이종찬]]과 [[권정달]]이 이재형을 만나 합류를 요청했다. 하지만 이재형은 자신의 몸값을 높여야 하니 즉답을 주지 않고 [[전두환]]을 직접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고, 결국 전두환과의 면담 끝에 합류를 결정했다.].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정당 [[전국구]] [[대한민국 국회의원|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83년까지 초대 민정당 대표를 역임했다. 이 시기 한일친선협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고, 일본 정부로부터 훈장을 받기도 하였다. "귀족적 / 옹고집이라 불릴 정도로 강단이 있어" 민정당 주류 세력과 "마찰을 빚다 '83년『자살이냐 타살이냐』는 독설과 함께 대표위원직을 물러났다."고도 한다. 대표 사퇴 이후 민정당 상임고문, 전당대회 의장을 맡았고 1985년 치러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정의당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그 해부터 1988년까지 [[대한민국 국회의장|국회의장]]을 지냈다. 그것도 상하반기 3년을 모두 재직했다.[* 당시엔 국회의장이 상하반기를 나누어 재직하는 관례가 없기도 했거니와, [[6.29 선언]]으로 불과 3년만에 [[제13대 국회의원 선거]]가 치러지면서 후반기 의장으로서의 재직 기간은 1년을 조금 넘기는 정도였다. 그러나 당장 11대 국회는 상하반기가 다른 인물이었고, 하반기 의장 취임도 6.29 선언 발표 전인 5월이었으니 결국 4년 내내 의장을 재임할 생각으로 재출마 했던 셈이다.] 이 과정에서 첫 취임 당시 다소 낯간지러운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자신의 의장 당선을 자기 입으로 발표했다.''' 12대 국회 최다선 의원은 [[신한민주당]]의 [[이철승]]이었으나, 당시 국회법에는 최다선자가 아니라 최고령자가 임시의장(의장 직무대행)을 맡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고령 의원이 바로 이재형 자신이었고, 따라서 선거의 사회를 봐야 했던 것.[* [[제15대 국회]]의 [[박준규]] 의원도 같은 상황에 처했는데, 이때는 국회법이 바뀌어서 최다선자가 임시의장을 맡아야 했다. 결국 그는 의장석에 올라가자마자 동료 의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차다선자 중 최고령자인 [[황낙주]] 의원에게 임시의장직을 양보했다.] 스스로도 민망했는지 자신의 득표수를 발표할 때 '이재형 230 표'가 아니라 ''''불초한 본인이 230 표''''[* 이 계수 과정마저도 웃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총 의원수 276석 중 재적 272석인데, 당시 국회법상 의원이 제출한 명패와 표 수는 일치해야했다. 명패 갯수는 271석이고 표 수는 272표였던 것. 이재형 임시의장은 즉석에서 '''최다득표자(그러니까 자신)의 득표를 무효표로 쳐서 1표 빼자고''' 제안하였고, 그래서 231표에서 1표 뺀 230표로 '''자신의''' 당선을 발표하였다. 이래저래 민망한 상황에서 '불초한 본인'이란 명언(?)이 나온 것. ~~자기 표 뺀 거다~~ 참고로 차득표자는 5표를 받은 제3당 [[한국국민당]]의 [[이만섭]] 의원이었다.]라고 말했다. 엄혹했던 5공 시절의 국회의장이지만 나름대로의 소신을 가지고 업무를 수행했다. 의사진행 발언을 신청한 한 신민당 의원에게 발언신청서 뒷면에 '''자네는 좀 참게'''라고 적어 되돌려 주는가 하면, 5공 초기 신군부를 향해서는 '''운전면허 갓 딴 사람들이니 험한 길 급히 달리지 말고 한눈팔지 마라'''고 충고하는 등 그 5공도 국회의장 이재형을 다루기 까다롭게 여겼다고 한다. [[https://www.joongang.co.kr/article/2682700#home|#]] 이런 상반된 일화들은 그가 조선말 반가의 후예이자 옛 야당의 "대부" 출신으로 민정당의 행각에 전면 가담한 핵심 실세라고 보긴 힘들었다는 점, 하지만 그런 귀족적 품성이 후배 야당 정치인들을 하대하며 정권에 부역하는 모습으로도 발휘되었음을 보여준다. 국회의장 재임 중이던 1986년 [[유성환 국시론 파동]] 때 [[신한민주당]] [[유성환]] 국회의원의 마이크를 꺼버린 일화가 유명하다. 이후 경호권을 발동해 야당 의원의 출입을 막은 채 유성환의 체포동의안 의결을 강행했다. 2년 뒤인 1987년 5월 국회의장 표결도 민망함의 연속이었다. 야당 [[통일민주당]] 의원 67명, [[신한민주당]] 의원 28명이 [[4.13 호헌조치]]에 반발하여 표결에 불참한 것. 이재형은 이번엔 재석 170석의 상황에서 불과 165표로 당선되었는데[* 1표는 같은 당의 [[김영구(1940)|김영구]] 의원, 1표는 [[채문식]] 의원, 남은 3표는 무효표였다.], 스스로도 "의석의 1/3 가량이 원 구성에 불참한 채로 의장 선거를 하고 본인이 당선된 심정에 '''혼인 잔치에 사돈집에서 거의 안 온 것 같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이래저래 군부독재기 최후의 국회의장으로서 낯부끄러운, 낯간지러운 일이 많았던 인물.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민주정의당 공천에서 탈락했다. [[3당합당]] 이후 정계에서 완전히 은퇴하였으며 1992년 1월 3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종로구)|사직동]] 262-77번지 자택[* 이 집 자리가 원래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과 그의 종손들이 살던 [[도정궁]] 터였다. 이재형 역시 덕흥대원군의 12대손인 것을 볼 때 기막힌 운명인 듯. 말년에 [[전주 이씨]] 대동종약원 원장을 지내기도 했다.]에서 [[숙환]]인 [[간경화]]로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92013000099218012&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92-01-30&officeId=00009&pageNo=18&printNo=8018&publishType=00020|사망했다]]. 말년은 다소 궂겼다. 1990년 10월 21일 상처하고 1991년엔 [[군포시]] [[산본신도시]] 개발로 선산 7만여평과 생가가 수용되었다. 아내는 선산이 아닌 경기도 [[화성시]] [[장안면(화성)|장안면]] 석포리에 묻혔고, 1992년 이재형 또한 이곳에 묻혔다가 2000년 내외의 묘소가 [[양평군]] [[양동면]] 삼산리로 함께 이장되었다. 국회의장 출신이라 국립현충원 국가사회유공자묘역에 안장될 수 있었을텐데 본인의 유언이었던듯 하다. 사후 1993년 그의 호를 딴 운경재단이 출범해 현재까지 사회공헌 사업을 하고 있다. 이사장은 이재형의 차남 이두용(李斗鎔, 1938. 4. 26 ~ ). [[https://www.woonkyung.or.kr/blank-3|운경재단 홈페이지]].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