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정재(조직폭력배) (문단 편집) == 생애 == 1917년 1월 6일 [[경기도]] [[이천시|이천군]] [[호법면]] 유산리의 부농가에서 아버지 이용환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호법면 유산리에서만 13대에 걸쳐 살아왔다고 한다. 그는 [[힘]]이 굉장히 셌다고 하는데, 고향 이천군에서 씨름대회가 개최되기만 하면 그 날 상품으로 걸린 [[황소]]는 전부 다 이정재의 몫이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였다. 참고로, 황소는 지금으로 비교하면 자동차 1대 값 정도로 크게 가치가 있던 상품이었다. 그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거쳐 휘문고등보통학교[* [[김영태]]와는 선후배 관계인 셈이다. 또한 이정재와 동갑 중에 중앙고를 졸업한 사람으로는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이용희(1917)|이용희]]가 있으며, 휘문고를 졸업한 사람으로는 국무총리 서리를 지낸 [[이한기]]가 있다.]로 전학해 졸업했다고 전해질만큼 당시의 [[교육]] 수준으로 보면 엄청난 고학력자[* 당시는 대학 나온 건달들도 있던 시대였다. 종로의 낭만주먹 건달 중 하나였던 낙화유수 [[김태련]]은 [[서울대학교]]를 다니다가 조직에 들어가면서 자퇴한 엘리트였다. 1940, 1950년대의 서울은 서울대를 나와도 의식주가 깔끔하게 해결되는 직장을 얻기 힘든 경제 여건이었다.]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 졸업 후 귀향해 농업에 종사하다가, 25세 되던 해 결혼했다. 얼마 뒤 아버지와 형이 별세하자, 고향의 가산을 정리하고 가족들과 함께 상경했다. 처음에는 처가살이를 하며 [[동대문시장]]에 점포 자리를 하나 얻어 '삼양상사'라는 간판을 내걸고 광목 장사를 했는데, 얼마 후 한 [[깡패]]와 시비가 붙자 그 깡패를 씨름 [[기술]]로 들어 메친걸 계기로 [[김두한]]의 부하로 주먹 세계에 입문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김두한]]이 속해있던 반도의용정신대에서 서기 업무를 봤었다고 한다. 당시에 보기 힘든 고등보통학교까지 간 [[엘리트]]로 김두한의 추천을 받아 특채로 [[경찰]]이 되었으며, 이후 [[대한청년단]] 종로구 동부 단장직을 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동대문 패션타운 관광특구|동대문 시장]]의 이권에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반민특위 문서에는 특별조사위원회 명단에 이정재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자세한 건 [[김두한/생애]]를 참고. [[파일:동대문파.jpg]] 칠형제파 결성 당시 이정재(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이후 시장 점포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던 [[조열승]]과 차석환을 포섭해 '칠형제파'라는 조직을 결성한다. [[6.25 전쟁]] 이후 '동대문시장 상인조합'을 조직한 후 파괴된 시장의 중심지 일대 3,000평을 광장주식회사로부터 매입하여 점포를 짓고 [[상인]]들을 입주시키는 한편으로 상인들을 모두 조합원으로 가입시켰다. 이처럼 점차 자신의 세력을 강화시킨 이정재는 상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과거 [[건달]]들이 폭력 행위, 협박, 공갈로 상인들에게 금품을 뜯는 폐단을 없애고 상인들의 애로사항이 있으면 해결해주면서 한 번도 상인들의 원망을 산 적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상인들의 원망을 사지 않는 한편으로 실은 절대 밖으로 노출되지 않는 방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거둬들이고 있었는데 광장주식회사로부터 헐값에 거둬들인 [[땅]]을 상인들에게는 고가에 판매하여 폭리를 취한 것을 비롯하여 시장의 전기·전화 관리세에 자가 발전을 구실삼아 당시 가구당 300환에 불과하던 관영 요금을 2,000환~2,500환까지 거출하고 [[전화기]] 교환을 핑계로 7,000환을 부과하는 등의 수법으로 막대한 이익을 취했다. 이러한 내막을 모르는 상인들에게서 이정재의 평판은 좋을 수밖에 없었는데 [[학력]]이 전무한 일반 조직폭력배들이 직접적인 방식으로 삥을 뜯었다면 이정재는 학식이 있는 인물답게 [[조삼모사|돌아서 삥을 뜯어온 것]]이다. 이정재의 세력은 날로 거대해지면서 [[경마공원|경마장]]에까지 미쳤는데 그가 체포되기 직전 시장의 규모는 종로 4가에서 종로 6가까지 이르는 70,000평 규모에 2,900여 점포를 아우르며 이정재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상인의 수는 12,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러한 거대한 규모 뿐만 아니라 당시 혼란한 시대상으로 인하여 상당수의 [[총기]] 또한 보유하고 있었으며 거대한 이권을 쥐게 된 이정재는 동대문 광장 입구에 1억환[* 현 시가 약 100억원]에 달하는 3층 [[건물]]을 짓고 옥상에 도장을 설치하여 부하들을 육성했다. 아래는 체포 당시 알려진 화랑동지회의 조직도다. || * 위원회 * 3인 위원회: 이정재('''두목'''), [[조열승]](부두목), [[임화수]](부두목)[* 이정재가 실각한 이후 사실상의 두목이 된다.] * 7인 위원회: 상기 3인 외 오영환, 고일심, 김양수, 차석환 * 참모부 - 감독반, 정치반, 사법반, 양성반, 사무반으로 구성 * 외곽부 - [[임화수]]가 주도하는 반공예술인단 * 행동부 - 서울 시내 하부조직 10개 파로 구성 * 특수부대 - [[이석재(조직폭력배)|이석재]] 외 7명 * 종로파 - [[심종현]] 외 20명 * 소공동파 - [[홍영철]] 외 20명 * 서대문파 - 최창수 외 30여명 * 광화문파 - 장영빈 외 50여명 * 종로4가파 - [[유지광]], 강승일 외 50여명 * 경마장파 - 이창수 외 50여명 * 동대문시장파 - 장세규 외 50여명 * 평화극장파 - 이천일 외 100여명 * 청년도장파 - 이창수 외 300여명 || 이 무렵 [[이성순|시라소니]]가 이정재에게 [[돈]]을 몇 차례 빌리고[* 이북 출신인 시라소니는 이북 출신들을 꾸준히 챙겼는데, 처음에는 이정재가 시라소니한테 돈을 순순히 줬지만 시라소니가 이정재를 찾아올 때가 하필이면 이정재의 부하들이 다 지켜보고 있는 상황이라서, 그런 시라소니의 요구를 계속 들어주면 이정재로서는 부하들 앞에서 자기의 체면을 깎이는 꼴을 당하게 되는 거라서 무척이나 불쾌했다.] 살 길이 막막한 전직 북파공작원 [[KLO]] 대원들에게 점포를 양도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50만환[* 현 시가 약 5천만원]에 달하는 돈을 요구하고 [[서북청년회]] 출신 상이군인들에게도 점포를 배당해줄 것을 요구하자[* 사실 1950년대 한국은 공식 집계된 실업률만 무려 30%에 달하고 대학교를 졸업한 대학생들조차 50%가 직장을 구하지 못해 대학교가 고학력 실업자 양성소라는 조롱을 언론사들로부터 들었을 만큼 실업 문제가 매우 심각했던 상황이라서, 그나마 간신히 구한 일자리를 다른 조직한테 넘겨주기란 너무나 무리한 요구였다.] 동대문파 간부들은 분노한다. 특히 [[자존심]]이 상한 이정재는 시라소니를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좁은 사무실로 유인하여 둔기와 손도끼 등의 흉기로 난자한 '시라소니 린치 사건'을 벌이기도 했으며[* 정확한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980년대 국내 언론의 보도를 보면 10명 이상이었다고 하며, 프로그램 꼬꼬무에선 20명이라고 언급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이화룡]]의 [[명동]]파와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고향 후배인 [[곽영주]]가 [[이승만]] 대통령의 눈에 띄어서 이승만의 [[경호]]를 담당하게 되면서 결과적으로 이승만의 측근이 되자 이정재의 위세는 [[자유당]]의 [[권력]]을 등에 업고 정계까지 [[월권]]을 행사하며 [[야당]] 인사들에 대한 집회 방해, [[이기붕]]의 자유당 의장 취임 공작 등등 수많은 정치 [[테러]]를 벌였다. 이 때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곽영주의 [[별명]]이 '곽박사', '부부통령'으로 곽영주가 [[경무관]]으로 승진하면서 [[대통령경호처장|경무대경찰서장]]이 되자 이정재를 이승만에게 알현시켰고 이정재는 이승만의 양아들이 되었다. 또한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야당 인사 및 기타 조직의 방해자들로 지목된 이른바 제3세력의 동시 다발적 [[암살]] 기도를 획책하기도 하였음이 혁명재판 당시 밝혀졌는데 당시 암살 대상이 되었던 인물로는 [[김태선]], [[이순용]], [[신익희]], [[조병옥]], [[장택상]], [[김상돈]], [[백두진]], [[문봉제]], [[김기홍(조직폭력배)|김기홍]], [[김두한]], [[조희창]], [[이화룡]], [[안두희]] 등 40여 명 가량이라고 한다. 이 계획은 당시 이정재의 행동대장인 [[김동진(조직폭력배)|김동진]]이 경찰에게 밀고함으로 무마되었다고 하는데 보복으로 김동진은 [[단성골드주얼리센터|단성사]]에서 영화 '황야의 역마차'를 감상하고 나오던 도중 조직원 [[이석재(조직폭력배)|이석재]]에게 [[저격]]을 받고 복부 관통상을 입었다. 이 사건이 바로 [[단성사 저격 사건]]인데 [[검찰]]의 수사 도중 자유당의 [[정치]]적 압력으로 인해서 이정재는 [[기소유예]]를 받고 풀려나게 됐다. 그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계 진출까지 꿈꾸고 있었는데 고향인 경기도 이천에서 [[민의원]] 출마를 계획했다. 이정재는 오래 전부터 이천을 기반으로 정계 진출을 꿈꾸었는지 부하들에게 "길가다가 이천 사람이 곤란을 겪고 있으면 발 벗고 도와줘라."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서울특별시]] 내 지지율이 바닥이었던[* 정작 이기붕의 원래 선거구인 서대문 을에서는 자유당 후보인 [[최규남]]이 당선 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자유당 내에서 이정재 세력을 견제해야 한다는 의견 때문에 그랬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기붕이 [[수도권(대한민국)|수도권]]이면서 만만한 [[지역구]]를 물색하던 도중 하필 이천을 선택하게 되었고[* 표면 상의 이유는 6대조 선산이 있다는 이유였다.] 이런 이기붕에게 이천 지역구를 반강제적으로 빼앗겼다. 이 때 이기붕과의 마찰로 말미암아 이정재는 이기붕의 아내 [[박마리아]]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치솟던 이정재의 권력도 이 때를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걷게 됐다. 1958년 이후 직함만 1인자 자리를 유지한 채 권력을 잃은 이정재는 자택에서 칩거하게 되었고 이 틈을 타서 처세의 달인 [[임화수]]가 실질적인 화랑동지회의 1인자로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C%A1%B0%EB%A6%AC%EB%8F%8C%EB%A6%BC.jpg]] 그러던 와중에 [[박정희]]가 주도한 [[5.16 군사정변]]이 일어나고 [[국가재건최고회의]]가 제1공화국 당시 이승만 정부의 비호 아래 비리를 저지른 부정부패 사범들과 조직폭력배, 반혁명 분자 등을 척결하는 [[혁명재판]]을 단행하면서 척결대상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이성순|시라소니]] 린치 사건, 단성사 저격 사건, [[4.18 의거|4.18 고대생 습격 사건]][* 이 때 사망한 대학생 김왈영은 서울 중앙고 출신으로 이정재의 고등학교 후배뻘 된다.] 등 이정재가 관여한 수많은 [[범죄]]를 재수사해서 혁명재판에 넘겼다. 결국 1961년 5월 21일 [[혁명재판]]부에서 특수범죄처벌에관한특별법 제7조 1항 단체적 폭력 행위 외 11개 범죄 행위로 [[기소]]되어 범죄 단체 수괴로 인정되면서 [[사형]] 판결을 받는다. 판결 이후 [[육군특수전사령부|공수특전단]] 대원들의 감시를 받으며 다른 깡패들과 함께 '나는 깡패입니다. [[국민]]의 심판을 받겠[[읍니다]].'를 쓴 플래카드를 들고 서울시내 한복판을 행진하며 [[조리돌림]]을 당했다. || [[파일:동대문 주적 사단 재판.jpg|width=500]] [[파일:이정재 깡패.png|width=235]] || || 재판 당시의 이정재의 모습들. 재판 당시 왼쪽 사진은 맨 오른쪽에 있는 인물이 이정재다. || 1961년 10월 1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향년 44세에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날 형무소장 면회라는 명목으로 감방에서 나와서 이동 중에 [[교도관]]들이 사형장으로 방향을 틀자 이정재는 처음에는 흠칫했지만 바로 체념하면서 "오늘부터는 대접이 바뀌는구만?"이라고 쓴웃음을 지으며 순순히 형장에 들어갔다고 하는데 사형당하기 전에 남긴 유언은 아래와 같다. >'''"나도 잘못은 있기에 억울하다는 말은 안 한다. 그런데 죄다 나에게만 책임을 넘기고 자신은 억울하다는 이들이 있다.[* 영화판을 주름잡던 [[임화수]]까지도 재판에선 난 이정재가 시켜서 학생들을 구타하게 했다고 주장했으며 다른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적어도 자기 잘못은 인정하라고 말하고 싶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