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존욱 (문단 편집) == 평가 == ||||{{{#!wiki style="margin:10px" ''' "장종은 원대한 포부로 하분(河汾)에서 일어나, 힘껏 싸워 변락(汴洛)을 평정했으며, 집안의 원수가 이미 설욕되고, 국운이 중흥했으니, 아무리 [[소강]]이 [[하나라]]를 이어 천자가 되었거나 [[광무제]]가 나라를 얻어 다스려도, 더할 나위가 없었다. 하지만 천하를 얻는 데에는 엄청난 고생을 하고도, 그것을 얼마나 빨리 잃었는가? 어찌 거듭된 승리에 교만해지지 않고, 안온한 환경에서 즐기며, 목욕의 어려움을 잊고, 사냥과 [[여색]]에 탐닉하였음을 자랑하였는가. 밖으로는 악공과 광대가 정치를 어지럽혔고, 안으로는 암탉이 홰를 쳤다. 재물을 매우 아껴 군대의 분노와 원한을 샀으며, 재물을 징수하여 만민의 재물을 고갈시켰다. 대신들은 죄가 없는데도 붙잡혀 처벌되었고, 뭇사람은 울음을 삼키며 재앙을 피했다. 무릇 여기에 하나라도 있으면 망하지 않을 수 없는데, 하물며 모두 가지고 있었으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다리겠는가! 조용히 생각하면 족히 만대의 명백한 경계로 삼을 만하다." '''}}} ---- {{{#!wiki style="margin:4px; text-align: right" {{{-2 - 《구오대사》의 저자 [[설거정]]}}}}}} || [[오대십국시대]] 전기의 미완의 [[군주]]. 어린 시절부터 유능하다는 평가를 꾸준히 받아왔고, 실제로도 그 평에 걸맞은 모습을 계속 보여주었다. 이존욱이 18세에 부친 이극용 사후 [[산서성|산서]]에 자리하고 있던 후당의 전신인 [[진나라]][* 이진(李氏), 북진, 호진이라고 한다. 다만 북진, 호진은 [[후진(오호십육국시대)|후진]]과 겹친다.]를 물려 받았을 때 남으로는 이미 옛 당나라의 4분의 1을 지니고 있어 천하의 패권을 쥐고 있는 후량, 북으로는 욱일승천하고 있던 거란, 동으로는 [[연(오대십국시대)|유연]](劉燕)과 접경하여 3면에서 압박을 받는 위태로운 형세였다. 맞서 싸운 상대 중에 야율아보기는 거란 왕조를 개창한 꽤 걸출한 인물이었고, 주전충을 상대로는 거의 안드로메다 관광 수준으로(...) 패배시켜버리까지 했다. 주전충이 [[황소의 난]]을 진압한 당대 최강의 [[군웅]]에다 이극용을 상대로는 그렇게 크게 밀리지 않았고 역으로 권모술수와 군사적 능력으로 산서로 쫓아버렸다는 행적을 생각하면 군사적인 능력은 실로 굉장한 편이었던 셈. 야율아보기의 부인의 평도 그렇고, 당대에는 "대적할 수 없는 인물"로 평가받았다. 3면이 적들로 둘러싸인 위태로운 정세에서 이존욱은 유연을 멸하고 거란을 격퇴시켰으며 당나라가 거의 200년 가까이 처치곤란해 했던 하북 3진의 성덕([[조나라]]), 위박([[위나라]]) 번진까지 폐하는 한편 종국에는 후량마저 멸망시킴으로써 불안하던 일개 지방 왕조를 중원의 패권을 쥔 오대의 정통 황조 중 하나로 승격시키는데 성공하였으며 더 나아가 [[이무정]]의 [[기나라]]를 멸하고 고계흥의 [[형남|형남국]]을 종속시켰으며 [[사천]]의 [[전촉]]을 멸함으로써 최악의 형세부터 시작하여 연전연승하여 '''[[천하]]의 절반'''을 차지하는 위업을 달성하였으니 이 판도는 [[후주]]의 명군 [[후주세종|세종]]이 통일 전쟁을 다시 시작하기 이전까지 오대 십국 중 최대의 판도였다. 이존욱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이 아니었다면 당말로부터 이어온 오대 십국 초반의 화북의 대할거는 좀 더 시간을 끌었을 것이고 거란이 그틈을 타 [[요태조]]가 [[요태종]]보다 20년 더 빨리 중원을 남침하였을 것이다. 그야말로 이존욱은 오대 십국 시대 초반부의 주인공이라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긍정적인 모습은 딱 거기까지.''' 전술한 것처럼 걸출한 군사적 능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정에서는 무능을 넘어선 막장 가도를 달리며 그 상태에 멈춰버렸고 통일 사업이나 백성들의 내정을 안정화시키는데는 철저히 실패하면서 이존욱 자신은 평생의 원수였던 주전충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고야 말았다. 잘 싸우는 군주와 잘 다스리는 군주는 다르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선례인 셈. 유능한 군사적 능력 및 식견과 간언을 받아들일 정도의 도량도 갖추고 있었으니 내치를 잘만 꾸려나갔더라면 평가가 더 높아졌을 것이고 더 잘 되었다면 오대 십국을 끝낸 통일 군주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러 모로 [[난세]]의 [[명군]]이자 치세의 [[암군]]이라 칭할 만한 황제이며 오대십국 후기의 미완의 명군 [[후주세종]]과 비견될 오대십국 전기 미완의 군주이다. 이존욱의 사후 사천에서 [[후촉]]이 독립해버렸으나 다행히 명종 이사원이 내정을 바로 잡은 덕분에 후당은 다시 [[중흥]]을 이룩하였지만, [[석경당]]의 [[역성혁명]] 탓에 이존욱이 힘겹게 쌓아올렸던 나라는 처절히 멸망당하고 후당은 결국 중국 역사에서 오대 십국의 단명한 나라 중 하나로 전락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후진]]을 건국한 [[석경당]]이 [[연운 16주]]를 통째로 거란에 할양하는 실로 [[충격과 공포]]의 매국행위까지 벌이면서 [[사망 플래그|후일 북방 민족이 중원을 짓밟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