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송) (문단 편집) == 평가 == ||||{{{#!wiki style="margin:10px" "이종(理宗)은 재위기간이 길었으니 [[인종(송)|인종]]과 같았다. 그러나 인종의 치세에는 현명한 재상들이 잇달아 나타났다. 이종이 재위한 40년 동안 이종면(李宗勉)·최여지(崔與之)·오잠(吳潛)과 같은 현명한 이들이 모두 중용되지 못했고, [[사미원]](史彌遠)·[[정대전]](丁大全)·[[가사도]](賈似道)가 위압과 복덕을 농단하여 이종과 처음과 끝을 같이 했다. 통치한 보람이 경력(慶曆)·가우(嘉祐) 연간에 미치지 못했으니 정말이로다. 채주(蔡州) 전투에서 다행히 대조(大朝)[* [[원나라]]가 원(元)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이전에 사용한 국호이다.]에 의지하여 협공할 방략을 결정하여, [[애종(금)|완안수서]](完顔守緖)의 유골을 함에 담고 재상 장천강(張天綱)을 사로잡고 돌아와 종묘사직에 바치기에 이르렀으니, 이 또한 가히 회계(會稽)의 수치를 씻고 제양(齊襄)의 원수를 갚았다고 할만했다. 도리어 땅을 탐내고 동맹을 파기하여 [[단평의 입락|입락(入洛)의 군대]]로 발단을 일으켜 전화가 끊이지 않아 영토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학경(郝經)이 사신으로 오자 가사도는 자신이 폐백을 보내고 강화를 청한 사실을 말하려 하지 않았고, 이종을 속이고, 사신을 구류하고 실상을 알리지 않아, 스스로 멸망을 재촉하였다. 아아, 매우 안타깝도다! 그로 말미암아 중년에 향락에 대한 욕망이 이미 커지고 정치에 게을러졌고 권력이 간신에게 옮겨가니 경연과 성명(性命)의 강독은 단지 실상이 없고 허황된 말을 취하였으니 본래 무익했다. 비록 그러하나 송나라(宋)는 가정(嘉定) 연간 이래로 바른 것과 간사한 것이 질서도 없이 서로 뒤엉켰고 국시가 정해지지 못했는데, 이종이 제위를 이은 이후부터 먼저 [[왕안석]](王安石)을 공묘(孔廟)의 제사에서 쫓아내고 염락(濂洛)의 구유(九儒)를 공묘에 올리고 [[주자(철학자)|주희]]의 《사서(四書)》를 표창하여 선비의 풍습을 크게 바꾸었으니, 전대의 간당비(奸黨碑)[* [[철종(송)|철종]]의 치세에 있었던 원우당적(元祐黨籍) 사건을 말한다.]와 [[경원의 당금|위학(僞學)의 금]]에 비한다면 어찌 크게 다른 점이 있지 않겠는가! 말년이 되어 큰 성과를 얻지 못했지만 후대에 이학(理學)을 통해 제왕의 통치로 복고하려 한다면 정치를 바로잡아 고치고 보좌하는 공을 고찰하고 논증하는 것은 실로 이종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 묘호를 '이(理)'라고 한 것이 딱 맞는 셈이로다!"}}} ---- {{{#!wiki style="margin:4px; text-align: right" {{{-2 - 『[[송사]]』}}}}}} || ||||{{{#!wiki style="margin:10px" ''' "이종은 공적과 과오가 서로 반반인 군주였다." '''}}} ---- {{{#!wiki style="margin:4px; text-align: right" {{{-2 - [[이지(명나라)|이지]], 『사강평요(史綱評要)』}}}}}} ||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