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형 (문단 편집) === 해방 이후 === || [[파일:이종영 해방 이후.jpg|width=250]] || [[조선건국준비위원회]]에 가입하고자 했지만, 건준 위원장 [[여운형]]한테 단박에 거절당했다. ||[[파일:대동신문2.jpg|width=100%]]|| || 이종형이 창간한 대동신문의 기사. || [[미군정|미군정기]]에는 [[극우]] 인사로 전향해서 대동신문을 만들어 신문기사 등을 썼다. 신문도 막장이었는지 1920년대 이상의 원로인들 회고에 의하면 '이건 신문사도 아니고, 주간지나 전단지 수준으로 선전지 수준이었다. 독자들도 거의 없었으며 극우 [[정치깡패]]들이나 보는 신문이었다.'고 한다. 이종형은 유독 [[여운형]]에 대해 일방적으로 악의적으로 헐뜯는데 혈안이었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이종형 자신이 친일 한시를 짓고 그 한시를 여운형이 썼다고 대동신문에 대서특필하면서 게재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문사 대동신문을 앞세워서 여운형 암살 음모를 찬미하거나 암살교시하는 내용의 기사를 싣기도 했다. 이 때문에 한때 미군정에 의해서 정간처분받기도 했다. 이후에도 극우파를 제외한 정치인 테러 활동을 뒤에서 지원한 것으로 의심받고 있기도 하다.[* [[김규식]]과 [[안재홍]] 등 온건우파세력들도 정치테러를 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극우 반공활동은 당연히 [[이승만]]으로부터 '''반공투사'''라고 극찬받기도 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48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법이 생기자 자신의 신문사 대동신문에서 '''"[[개소리|반민특위는 망민법]]"'''이라며 그들을 매우 까댔다. 그가 했던 망언들이 상당히 가관인데 다음과 같았다. >'''"법이 없던 시절에 있던 일을 새 법을 만들어 잡아 들인다면 수많은 사람이 잡혀갈 것이다. 건국대업은 누가 이룰 것이냐?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 >1947년 부일협력처벌법안이 논의되자 한 말. >'''"친일파 문제는 그 시대 공동의 책임이다. 합병조약같은 중대 행위자 외에는 모두 직업상 종사한 자들이다. 망민법은 그 취지를 넘어 광범위한 희생을 초래하고 민심을 어지럽힐 뿐이다."''' >---- >1948년 정부 수립 이후 반민족행위 특별처벌법 초안이 상정되자 반대하면서 한 말. >'''"이런 민족분열의 법을 만드는 것은 [[종북몰이|국회 안에 있는 공산당 프락치의 소행]]이다. 국회 내의 [[김일성]] 앞잡이들을 숙청해야 한다."''' >---- >1948년 9월 반민특위법이 제정되자 한 말. 그리고 친일 자본가 [[박흥식]] 다음으로 2번째로 체포되었다.[* 이때 반민특위 특경대가 자신의 자택을 급습하자 이종형은 '''“내가 무슨 죄가 있길래 잡으러 왔느냐”'''면서 [[리볼버|육혈포]]를 품속에서 꺼내 반항하다가 형사들에게 제압당해 쇠고랑을 차게 되었다고 한다.] 반민특위에 체포되면서도 그는 끝까지 특조위 사무실에서 "'''나는 애국자다. 나를 친일파로 몰아넣다니 이럴 수가 있느냐. 내가 풀려나는 날 한민당, 빨갱이, 회색분자를 모조리 토벌하겠다!'''"며 난동을 부렸고 마포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도 "'''내가 감옥에 들어온 것은 빨갱이를 잡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사방에 정적을 만든 탓'''"이라며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1949년 3월 29일 반민특위 법정에서도 기소문 낭독이 끝나자마자 "나는 공산당을 때려부순 애국자다! 훈장을 달아줘야지 쇠고랑을 채우다니! 공산당을 토벌했다고 나를 재판할 순 없다! 대한민국에서는 반공주의자를 처단할 수 없다!", "나는 친일파가 아닌 애국자요.", "빨갱이들이 지금 나를 친일파로 몰고있는 것이다."라고 변명했고 '''"자신은 만주에서 공산주의자들을 토벌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면서 자신이 '''"독립운동의 터를 닦은 애국자"''''라고 떠들어댔다.[* 이종형의 말에 의하면 '''"나는 [[3.1 운동]]에 참여했었고 일제 경관을 2명이나 죽이고 감옥에서 10년 동안 지낸 독립운동가다!"'''라고 주장했는데 어떠한 자료도 없고 전혀 근거가 없는 '''헛소리'''다. 그리고 이승만과 친일파들이 반민특위를 북한과 협잡한 빨갱이 집단이라고 종북몰이했지만 북한의 김일성도 친일파를 등용한 것을 보면 모순된 헛소리에 불과하다.] 심지어 이종형은 '''재판장에게 욕설까지 퍼부었다고 한다.''' 그러나 1949년 7월 12일에 있던 2차 공판에서는 1차 공판도 '''능가하는''' 망발을 해댔다. 실제로 이종형은 방청석이 초만원을 이루었던 이곳에서 "당시 [[만주|그곳]] 사람들은 나를 [[제갈공명]]의 환생이라고까지 칭송했다"는 말을 남겼으며 심지어 파렴치하게도 "[[감성팔이|반민특위가 나의 아내까지 잡아가둬 8살 난 아들이 고아가 되었다]]"며 방청석 맨 앞줄의 소년을 가리키고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울먹였다고 한다.[*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aver?articleId=1977081500329205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7-08-15&officeId=00032&pageNo=5&printNo=9809&publishType=00020|1977년 8월 15일자 경향신문 중]]] --참 가지가지한다.-- || [[파일:external/rokps.or.kr/242.jpg|width=150]] || || 국회의원 시절의 이종형 || 그리고 이종형은 1949년 8월 26일에 3차 공판에 출두할 예정이었으나 병에 걸렸다며 재판에 출석하지 않아 3차 공판은 취소되었고 결국 8월 27일에 병보석 판정이 내려지며 풀려나왔고 이후 반민특위가 해산되면서 이종형에 대한 처벌은 흐지부지해졌으며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고향인 [[강원도]] [[정선군]]에서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소속(이승만 계열)으로 당선되어 대한민국 제2대 국회에, '''그것도 유권자들의 [[직접선거]]를 통해 국회의원으로 당당히 당선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