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형 (문단 편집) == 가족 관계 == 아내 이취성(李翠星, 1918~1951)의 본명은 '강신상(姜信祥)'으로, '이취성'이라는 이름은 남편이 지어준 필명이다. [[배화여자고등학교|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공주사범학교 강습과에 들어갔다가 학비 문제로 중도 퇴학당했고 어릴 적부터 알던 이종형과 1941년경에 결혼하고 딸 1명과 아들 1명을 낳았다. 남편과 함께 대동신문을 경영하기도 했으며 여자국민당[* 당수가 초대 상공부 장관이자 후에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국회의원이 되는 [[임영신]]이었다.] 총무부장으로서 '반민자 처단은 시기상조'라는 성명을 내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기도 하고 남편의 구명운동을 하기도 했다. 1949년 2월 8일에는 '''100만 원''' 규모의[* 다시 말하지만 '''1949년''' 기준으로 100만 원이다.] 사기에 연루되어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되기도 했는데[* 그녀는 구속되는 순간에도 "나를 잡는 동기는 [[김상돈]] 위원장의 지령에 의한 것이냐. 어째서 이렇게 잔인무도한 짓을 하느냐."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2달도 안 지난 동년 3월 26일에 무죄 석방되기도 했으며 1949년 11월 22일부터 간행되던 주간 대동신문의 사장을 역임하다가 1951년 11월 22일에 저택에서 산후급증으로 향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했다. 반면 이종형의 장인어른과 처남, 즉 이취성의 아버지와 오빠는 많은 공적을 남긴 사람들이었는데 먼저 이취성의 아버지이던 강병주(姜炳周, 1882~1955)는 [[조선어학회]]의 유일한 목사 회원으로서 '큰 사전' 편찬에 기독교용어 전문위원으로 활동하여 '한글 목사'라는 별명을 얻었고 최악의 친일파였던 사위와 그런 사위를 두둔한 딸과는 달리 '''독립운동에 가담한 사람이었다.''' 실제로 강병주는 [[3·1 운동]]에 가담했기 때문에 대구형무소에서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으며 1938년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취성의 오빠였던 강신명(姜信明, 1909~1985)은 [[연세대학교]] 이사장, [[숭실대학교]] 총장, 대한기독교교육협회 회장,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고 [[1970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은 명망 높은 목사이자 교육자였으며 이쪽도 친일 행위에는 전혀 가담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