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훈(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초년기 === 이종훈은 1856년 2월 20일에 경기도 광주군 실촌면 유사리(현 광주시 곤지암읍 유사리)에서 아버지 이우재(李禹載)와 어머니 [[선산 김씨]]의 3남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광주이씨 대동보>·[[http://db.history.go.kr/id/hd_012r_0010_0130|3.1 운동 당시 신문조서]]] <천도교회월보>의 <천도교 장로 이종훈씨 약력>에 따르면, 이종훈은 온유하고 인자했으며 어린아이와 같은 즐거움이 있는 성품이었다고 한다. 또한 언행이 일치하고 대인을 대할 때 경솔함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어려운 일에 처해도 여유가 있는 삶의 모습을 보여줬고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아일보> 1921년 5월 3일자 기사 '33인의 1인'에 따르면, 이종훈은 본래 성정이 강직하여 한 번 굳게 정한 뜻이라면 변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이종훈은 어려서부터 글 잘하기로 소문이 났었고, 10살 때부터 14세까지 한학을 배웠다. 그러나 학문에는 뜻이 없어 공부를 중단하고 7, 8년간 유랑생활을 했다. 21세 때 실촌면 사동능곡의 한 산을 사들여 진철점(眞鐵店)을 경영했지만 4년만에 때려치고 다시 설월리에서 강순심과 함께 수철점(水鐵店)을 동업했지만 3년만에 폐업했다. 이처럼 장사에서 연이어 실패를 맛본 이종훈은 서울로 상경했고, 판윤 이원회(李元會)의 주선으로 해영 별군관에 임명되었지만 곧 적성에 맞지 않아 사직했다. 이후 1886년 7월 인천으로 가서 만석동 북송포리에 선상객주를 맡아 부를 축적했지만 불의의 사고로 인해 4년 만에 객주 생활을 그만뒀고, 함흥으로 이주한 이종훈은 북청, 정평, 영흥 등지에서 민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한동안 금전대차영업(金錢貸借營業)을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