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훈(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동학 농민 혁명]] === 1893년 1월 17일, 이종훈은 동학에 입도했다. 이후 그는 고향인 광주에서 포교 활동을 시작했고, 뒤이어 지평, 여주, 이천, 충주, 음죽, 안성 등 경기도와 충청도 일대에서 포교했다. 그는 열성적으로 포교를 수행하면서 동학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엔 [[손병희]]의 핵심 참모가 되었다. 그가 동학의 초대 교주 [[최제우]]의 신원운동에 참가했는지는 기록이 없어서 알 수 없지만 신도로서 참가했을 가능성이 높다. <천도교 장로 이종훈씨 약력>에 따르면, 이종훈은 보은 척왜양창의운동 때 말 두필과 8백냥을 기부했다고 한다. 이후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발발하자, 광주 일대를 관할하던 이종훈은 곧바로 거병을 준비했다. [[권병덕]]은 <갑오동학란>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이종훈, 이용구는 각처에 두령을 연락하여 일어나니, [[홍병기]]. 신수집. 임학선은 여주에서, 홍재길. 신재련은 충주에서, 임명준 정경수는 안성에서, 고재당은 양지에서, 이근풍. 전규석. 전일진은 이천에서, 신재연은 양근에서, 김태열. 이재연은 지평에서, 염세환은 광주에서, 이화경. 임순호는 원주에서, 윤면호는 횡성에서, 심상현. 오창섭은 홍천에서 일어나서 모두 충주 황산으로 회집하니 회중이 수십만 인에 달했다. 이종훈은 광주, 여주, 양지, 지평, 이천의 동학농민군을 충주 외서촌 황산에 집결한 동학군과 합류시켰다. 여기에 이용구의 충청도 북서부 일대와 강원도 남서부 지역 동학군도 합세했다. 정부는 황산에 집결한 동학군을 진압하기 위해 선유사 정경원을 파견했다. 정경원은 포군 5백여 명을 이끌고 황산에서 1리 떨어진 충주 사창리에 머물렀다. 이에 이종훈은 이용구와 함께 정경원을 만나 담판을 시도했다. 이종훈과 이용구는 "우리는 신민이다. 국사가 급박한 때를 당하여 스스로 떨쳐 일어나 해악을 무찌르는 것은 당연한 의리가 아닌가?"라고 주장했고, 정경원은 이를 수용해 군사를 10리 밖으로 물렸다. 황산에서 10여 일 동안 주둔한 동학군은 보은 장내로 가던 중 보은 장내로 가는 길목에 있던 괴산 관아를 공략하려 했다. 이종훈은 청천에 모여있던 동학군과 연합하여 괴산 관아를 점령하는 문제를 협의했다. 괴산관아를 점령하려는 목적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괴산관아에서 동학 접주 백창수와 우제관을 처형한 것에 대한 보복이고, 다른 하나는 무기와 식량의 확보였다. 이 정보를 입수한 가흥병참부는 10월 2일 하라다 츠네야(原田常八) 소위의 지휘 아래 일본군 27명을 출동시켜 괴산에서 동학군의 동향을 정탐했다. 하지만 별다른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일본군은 동학군이 주둔하고 있던 당동까지 척후병을 보냈다. 이때 읍내에서 15리 떨어져 있는 애재에 머물고 있던 동학군은 일본군과 조우, 전투를 개시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4명의 사상자를 내고 충주로 퇴각했고, 동학군은 100명 또는 200명의 사상자를 기록했다. 이후 동학군은 괴산 관아를 점령하고 객사를 제외한 모든 건물과 서류를 불태웠으며, 민가 5백여 호 역시 불태웠다. 천도교중앙총부수습위원회가 1962년에 발간한 <천도교사부총서>의 <천도교회사초교>에 따르면, 민가를 불태운 것은 괴산접주 서모가 괴산군민들에게 타살당한 것에 대한 보복으로, 서접주의 13세 된 아들이 주도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동학군은 괴산관아에서 무기와 식량을 확보한 후 청주 청천으로 향해 손천민 등과 합세한 뒤 보은 장내에 도착했다. 보은 장내에 집결한 경기 지역과 호서지역 동학군은 손병희를 중심으로 대오를 정비했는데, 이종훈은 중군을 맡아 호남 지역 동학군과 연합 정선을 형성하기 위해 논산으로 출발했다. 논산에서 연합 전선을 형성한 동학군은 공주를 점령하기 위해 우금치 일대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연합 부대와 10여 차례의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다. 그러나 동학군은 일본군의 우수한 화력에 밀려 대패했다. 이후 동학군은 경천, 논산, 여산, 익산, 전주, 원평, 태인, 고부 백산, 정읍, 장성으로 퇴각했다. 이종훈은 이 퇴각 과정에서 군대를 어떻게든 수습하고자 애썼고 원평과 태인 등지에서 관군과 14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장성에서 전봉준의 호남 지역 동학군과 결별한 호서 지역 동학군은 손병희와 이종훈의 지휘 아래 무주, 임실, 영동 용산, 청산, 보은으로 진군했다. 이종훈이 이끄는 동학군은 영동 용산에서 관군을 물리치고 청산을 점령했지만, 곧 관군과 일본군 연합부대와 보은 북실에서 맞붙었다가 대패하고 음성 되자니까지 후퇴했다. 음성 되자니에서도 관군에게 패한 동학군은 결국 손병희에 의해 해산되었고, 이종훈은 동학 교주 [[최시형]]을 보필했다. 최시형이 1898년 체포되어 서소문 감옥에 갇혔을 때, 그는 옥바라지를 자처했고, 최시형이 처형된 뒤 시신을 수습하여 경기도 광주군 송파에 안장했다. 이종훈은 최시형의 시신 수습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초롱과 우산을 김준식에게 들리고 상여군 두 사람을 데리고 시체를 파내는데 일꾼들은 시체를 손에 대이기가 싫어서 흙 파는 괭이로 떠들추려 한다. ” 아 안돼! 안돼! 아무리 남의 시체이기로 우리들이 돈 받고 하여주는 일인데 그래서는 못쓴다. 너희 두 사람이 하체를 들라. 내 상체를 들 터이니“ 하고 무덤 속에서 시체를 땅위에다 끄집어내어 모셔놓고 본즉 몸에는 아주 못쓰게 된 헌요 한 겹이 감겨 있을 뿐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