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훈(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천도교 === 최시형을 무사히 안장한 이종훈은 1889년 8월 쌀 4두를 마련해 홍천군 수유산에 은거하면서 백일기도에 몰입했다. 이후 종교 활동에 전념하던 그는 1904년 손병희가 주도하던 동학 개화운동에 참여했다. 당시 손병희는 관의 체포령을 피해 일본에 망명하고 있었다. 손병희는 근대화된 일본의 현실을 목도하고 조선에서 동학을 시대의 흐름에 맞춰 개편하기로 결심했다. 1904년 2월, 손병희는 이종훈, [[박인호]], [[홍병기]] 등 40여 명을 일본으로 불러 그 취지를 설명했다. 이에 동학교단은 대동회를 비밀리에 조직했다. 이후 손병희는 1904년 4월에 박인호와 홍병기를 일본으로 다시 불러 '흑의'를 입고 두발을 자르도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그해 7월에 이종훈, 박인호, 홍병기 등은 모화관 산방에 모여 대동회를 중립회로 변경했다. 그러나 중립회가 동학 세력임을 간파한 정부는 탄압을 가했고, 손병희는 회명을 진보회로 개명하게 했다. 동학교인은 전국 각지에서 진보회를 조직하고 흑의 단발을 감행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으로 동학교인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진보회를 이끌던 [[이용구]]는 [[송병준]] 등이 조직한 [[일진회]]와 통합했다. 이후 일진회의 친일 행위로 인해 동학교단이 친일종교로 지탄을 받자, 손병희는 1905년 12월 24일 동학을 천도교로 전환했다. 손병희는 천도교로 전환한 뒤 동학교인들이 일진회를 탈퇴하고 천도교로 귀의하기를 권고했다. 이때 이종훈 역시 천도교에 귀의했다. 손병희는 1906년 2월 26일 천도교중앙총부를 조직하고 교단 조직을 정비했다. 이종훈은 천도교중앙총부 조직 당시 도집(都執)으로 선임되었고, 이후 현기사 고문과원, 서응관장, 현기사장, 고문, 천주, 현기사 혜양과원, 성도사, 직무도사장, 대종사장, 장로 등의 주요 원주직을 맡아 종교인으로 활동했다.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친일단체였던 일진회를 비롯한 모든 사회단체 등이 강제 해산되었다. 그나마 활동이 가능한 단체는 종교단체였다. 천도교는 이 점을 이용해 철저한 종교 활동을 보임으로서 일제의 사회단체 해산령을 회피했다. 이후 천도교는 비밀결사를 조직해 민족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중 하나가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였다. 당시 이종훈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이 적지 않기 때문에 농어민을 포섭하여 민중운동을 전개하면 효과가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이종훈은 20여 일 동안 농민의 피해 상황을 조사했고, 농민의 80%가 배일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우선 경기 지방의 농민을 상대로 시위운동을 일으키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를 바탕으로 삼아 범신생활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는 표면적으로는 비정치성을 띈 신생활운동으로서 국민대회를 개최하기로 하고 취지문, 결의문, 행동강령 등을 마련했다. 그러나 개최 전날인 7월 14일 종로 경찰서에게 서류들이 압수되면서 무산되었다. 신생활운동이 무산되자, 이종훈, [[이종일]] 등과 보성사 직원들은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들은 천도교 단독으로 하는 것보다는 [[한용운]], [[백용성]], 이능화 등 불교계 인사와 접촉했지만 한용운이 민생안전이 우선이라며 거절하자 천도교 단독으로 민족문화수호운동을 전개하기로 했다. 그 결과 1912년 10월 31일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가 결성되었고 본부를 보성사에 두었다. 그리고 총재에 손병희를 추대했고, 회장에 [[이종일]]이 맡았으며, 부회장에 [[김홍규(독립운동가)|김홍규]], 제1분과위원장에 [[권동진]], 제2분과위원장에 [[오세창]], 제3분과위원장에 이종훈이 선임되었다. 그밖에 보성사 직원에었던 [[장효근]], 신영구와 [[박준승]], [[임예환]] 등이 참여했다. 민족문화수호운동은 일전의 신생활운동이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비밀결사의 형태로 천도교단을 중심으로 전개해 나갔다. 민족문화수호운동은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궁극적으로는 만주에서 이상룡 등이 조직한 부민단과 같이 발전시킬 계획이었다. 이에 따라 지방에서 올라오는 교인들을 설득하는 한편 지방조직을 강화시키려 했지만 일제의 감시로 인해 지방 조직이 뜻대로 추진되지는 못했다. 한편,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는 민족문화수호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천도교인을 대상으로 강연활동을 전개하였다. 일차적으로 1913년 5월 7일 보성사에서 [[이종일]]을 강사로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어 1914년 4월 29일 교인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민족문화수호의 의의에 대한 강연회를 개최했다. 이종훈은 이 강연회의 강사로 나섰지만 강연 도중 한국인 형사에 대해 제지당했다. 그 후 그는 앞으로 이와 같은 강연회를 개최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풀려났고, 민족문화수호운동본부는 표면적인 활동을 없애고 철저하게 비밀결사로 활동했다. 그러던 1914년 8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천도교단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독립의 기회가 올 것으로 판단하고 천도구국단을 비밀리에 조직했다. 이종훈은 천도구국단의 임원으로는 선임되지 못했지만 간접적으로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1916년 2월 20일, 이종훈, [[이종일]], 장효근, 김홍규, [[박준승]] 등은 국제 정세에 관해 의견을 교환했다. 이종일이 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러 구 정객을 앞세워 민중운동을 전개할 것을 제안하자, 이종훈이 적극 찬성했다. 또한 김홍규가 [[한규설]]과 접촉하겠다고 밝히자, 이종훈은 기독교계의 거두인 [[이상재]]를 만나 민중운동을 협의하기로 했다. 그 밖에 신영구는 윤용구, 장효근은 [[김윤식(조선)|김윤식]], 홍병기는 [[박영효]], 이종일은 [[남정철]]을 각각 담당하기로 했다. 이종훈은 이상재를 만나 의논한 끝에 천도교가 나선다면 기독교를 동원해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민중운동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이종일은 김홍규와 함께 손병희를 찾아가 민중운동에 참여해줄 것을 간청하여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 손병희는 자금지원뿐만 아니라 스스로 앞장 설 것을 다짐하였고, 민중운동을 이종훈을 비롯 권동진ㆍ오세창ㆍ최린 등과 협의하여 추진할 것을 주문했다. 이에 민중운동은 이종훈, 이종일, 권동진, 오세창, [[최린]], 그리고 천도구국단을 중심으로 준비되었다. 그리고 천도교 내에서 [[나용환]], [[김완규]], [[양한묵]] 등 동지를 확보해 나갔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