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종훈(독립운동가) (문단 편집) === 천도교의 분열 === 3.1 운동 이후, 이종훈은 천도교 개혁과 비밀 결사에 참여했다. 당시 천도교단은 손병희, 최린, 이종훈 등 대부분의 교단지도부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신진 지도부가 대체했다. 이들 그룹은 주로 청년들로 문화운동을 주도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기존의 천도교 지도부와 신진 지도부간의 갈등이 불거지기 시작했다. 오지영, [[최동희]] 등 신진세력은 자신들을 혁신세력이라고 칭하고 감옥에서 풀려나온 원로들을 포섭했다. 이종훈은 이들에게 호응했고, 1922년 1월 17일 종법원 종법사 겸 경기도 교구순회 책임자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교단은 여전히 갈등이 빛어졌고, 1922년 4월 손병희가 가출옥한 뒤 구관제의 부활을 선언하면서 구파와 신파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교단은 손병희의 뜻에 따라 구관제를 부활했고, 그동안 혁신 세력을 지지했던 원로들도 대부분 구파로 돌아섰다. 그러나 이종훈은 중립적 입장을 취하면서도 신파와 함께 했다. 이로 인해 이종훈은 불온한 문서를 배포하여 교단의 체면을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홍병기, 오지영, 정계완 등과 함께 1922년 5월 12일 제명되었다. 1개월 후인 6월 13일에 제명이 취소되면서 교적은 다시 회복되었지만 그의 명예가 손상되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얼마 후 손병희가 죽고 교단의 책임자 박인호가 사임하자, 교단은 통합을 모색했다. 구파와 신파 양측은 교인대회를 개최했는데, 이종훈은 신파의 교섭위원으로 참여했다. 그러나 양측의 교섭은 합의점을 찾지 못했고, 신파는 1922년 12월 말에 천도교연합회를 조직해 천도교와 분리되었다. 그러나 이종훈은 천도교연합회에 참여하지 않고 천도교단에 합류했다. 그는 천도교단의 화합을 위해 '평화 경고식'을 주도해 구팡와 신파 인사들을 참석시켜 그동안의 갈등으로 인해 쌓인 감정을 해소하도록 유도했다.이후 이종훈은 강도사에 선임되어 교리 강구 및 교무 발전을 도모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